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학교에서 갑자기 가을 축제를 연다고 했다. 연예인을 초청했다며 야간자율학습을 건너뛰고 오라고도 했다. 600여명의 학생들이 들뜬 마음으로 강당에 모였다. 하지만 축제는 없었다. 어떤 드라마에 나오는 학교 축제 장면에 군중역의 단역으로 출연하기 위해 우리는 그곳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드라마 제작팀이 학교에 장소 섭외비를 주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몇 시간 동안 두어 구절로 구성된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함성을 지르는 무보수 노동을 했다. 당시 그 학교를 운영하던 학교법인은 명지학원이었다.

  얼마 전 명지학원이 파산신청을 당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이번 파산신청은 15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2004년 실버타운을 분양하며 광고했던 내용이 지켜지지 않자 분양 피해자 33명이 분양대금을 반환하라며 소송을 했고, 법원은 2013년 이들이 약 43000만원을 청구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명지학원은 사립학교법의 조항을 악용해 청구된 돈의 지급을 미루었고, 이를 보다 못한 피해자 한 명이 채권자로서 파산신청을 냈던 것이다. 그동안 피해자는 83세의 노인이 됐고 노후자금은 아직 돌려받지 못한 상태다.

  명지학원이 돈을 돌려주지 않은 것은 위법이 아니다. 사립학교법 28조는 학교가 기본재산을 처분할 때 교육부의 허가를 받게 되어 있다. 2016년 헌법재판소가 이 조항에 대한 피해자들의 헌법소원심판을 기각할 만큼, 이 조항은 교육을 위해 필요한 법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립학교는 다양한 수익사업을 시도하면서 양질의 교육환경을 만들어낼 책무가 있다. 재정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교육환경이 열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명지학원의 대응을 비난하는 이유는 아마도 교육을 소명으로 하는 기관에 보통의 기업들보다는 조금 더 윤리적인 모습이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직원의 퇴직선물을 법인카드로 구매하는 것이나 티켓을 판매해 번 돈을 조직원에게 배분하는 것은 일반 기업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황금열쇠를 사거나 학교의 대표적인 행사에서 응원단이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에 분노한다.

  학교는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원칙이 통용되지 않는 무수한 공간 중 하나다. 학교는 일반기업과 달리 폐쇄적인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린다. 학교는 아무런 설명 없이 학생을 엑스트라로 동원할 수 있고 근로장학생 제도를 통해 귀찮은 노동을 전가할 수 있다. 교직원이 아무리 불친절해도 학생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입실렌티의 주최권을 응원단에서 동아리연합회로 넘기기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헌법소원을 내거나 파산신청을 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마저 없으면 변하는 게 없는 채로 10, 15년의 세월은 우습게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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