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스토리는 꽤 단순하다. 성실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호평받는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은 어느 댄스파티에서 괴텐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다음날 그녀 집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사실 괴텐은 경찰이 오랫동안 쫓고 있던 범죄자였고, 경찰은 그녀가 괴텐이 도주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의심한다. 이 소식은 짜이퉁이라는 신문사에 들어가게 된다. 짜이퉁은 사건과 더불어 그녀에 대해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낸다. 짜이퉁이 저지르는 왜곡은 심해진다. 그녀에 대한 호의적 인터뷰 내용도 왜곡해 선정적으로 사용한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짜이퉁에 의해 평범하고 성실한 그녀는 종국에는 창녀, 테러리스트, 빨갱이로 보도된다. 이러한 기사를 접한 그녀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쓰러져 결국 사망한다. 그녀는 짜이퉁이 색칠한 대로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짜이퉁 기자에게 11 인터뷰를 제안하며 그녀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녀는 그녀에게 성희롱을 던지는 기자 퇴트게스를 총으로 쏴 살해하고 자수함으로써 이야기는 끝난다.

  KBS 공영미디어연구소가 510일 발표한 미디어 신뢰도 조사에서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6명은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언론에 대한 신뢰는 이처럼 부족하다. 카타리나 블룸처럼 한 인물을 대놓고 집요하게 왜곡하는 상황은 소설 속 극적인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 담론과 여론을 지배하고 주도하는 우리나라 언론사들은 짜이퉁과 다르다고 명쾌히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짜이퉁보다 더 교묘하게 정치 사회적 행위자로서 자기 이익을 적극 관철한다. 짜이퉁처럼 언론사 혹은 그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세력의 이익을 위해 펜을 휘갈겼던 것이 낯설지 않다. 유료발행부수 1위를 자부하는 모 신문사는 브로커에게 금품을 제공받거나 자식의 인사청탁을 건네는 대가로 브로커와 연계된 기업에게 유리한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그 신문사는 담론과 여론을 주도하는 권력을 악용하는 일 역시 주저하지 않는다. 사주의 범법행위 의혹이 제기되자 경찰청장을 찾아가 자신들이 정권을 창출할 수도, 퇴출시킬 수도 있다며 수사 종결을 공공연히 협박한다.

  이 소설을 인상 깊은 이유는 책을 덮었을 때 소설이 내가 마주하는 현실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소설이 지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 뒤에 숨어 비판을 독점하고 비판의 대상에서는 교묘히 성역으로 남으려는 존재는 비단 이 소설 속에만 있지 않다. 책을 덮고 눈을 들어 올리면 우리의 언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실과 결부 지어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을 찾는 독자가 있다면, 하인리히 뵐이 쓴 이 책을 추천한다.

 

독어독문학과 15학번 윤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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