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버닝>과 <기생충>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뒤늦게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버닝>이 떠올랐다. 두 영화는 닮은 점이 많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나온다. <기생충>에서는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 내 가족과 단독주택에 사는 박 사장(이선균) 내 가족이, <버닝>에서는 허름한 농가에 사는 종수(유아인), 달동네 단칸방에 사는 해미(전종서)와 고급빌라에 사는 벤(스티븐 연)이 등장한다. 두 영화는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엮이며 일어나는 이야기이며, 못 사는 쪽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그들은 몇 개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잘 사는 쪽을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누군가를 살해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가 이야기의 중심축에 있다. <기생충>은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에서 시작해 끝나며, 기우는 극 중에서 가장 다양한 심리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버닝>은 종수의 이야기이며 그의 모호한 판단과 상상이 극의 얼개를 구성한다. 두 영화는 삶에서 마땅한 가치를 찾지 못하는 가난하고 권태로운 젊은 세대가 잘사는 이들을 만나면서 욕망하고 혼란해 하는 이야기이며, 청년은 끝내 합리적인 답을 찾지 못한다. 그는 갈등의 절정에서 누군가를 살해하려 하거나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계획 세우기소설 쓰기를 시작한다.

  두 영화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부르주아와 노동자, 부자와 빈자, 혹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보지 않는다. 둘을 가르는 기준들은 상징들 뒤에 숨어 있다. 우리는 사회의 상층에 속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정의하는 전통적인 구도들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지 오래되었고 그 보상으로 잘 사는 이들과 종종 만나 꽤 잘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어떤 모호함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에서 그 모호함은 젊은 세대의 눈에 더 짙게 드리워 있으며, 그것은 고통스럽게 경계를 드러내는 살해의 사건 이후에야 사라진다. 이후 두 젊은 주인공은 비로소 무언가를 시작하지만, 그것은 헛되어 보이고 비루해도 보인다. 작은 빛은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있지만 그걸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이곳저곳에서 후기를 몰아 읽었다. 가장 눈에 띄었던 후기는 기택이 가난한 게 사실은 기택의 무능력함이 가져온 결과라는 해석이었다. ‘대왕 카스텔라를 포함해 몇 번의 사업을 시도하고 딸인 기정(박소담)에게 예체능 공부를 시킬 정도면 못 해도 중산층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기를 쓴 이는 자업자득인 주제에 박 사장을 살해한 기택이 파렴치하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보면, 종수의 가정이 파탄이 난 것도 아버지의 지나친 고집 때문이었으며 그가 조금만 타협했다면 여건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종수의 살인도 근거 없는 것이었을 따름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러한 해석들에 일부분 공감했고, 그랬기 때문에 나 역시 이 세상이 꽤나 모호하다고 느끼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명징한 것이 하나 있는데, 상상의 세계에까지 법치와 경쟁주의를 강요하게 되면 모호함을 그린 작품의 감상마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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