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빠이 이상용 교우가 팔을 들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뽀빠이 이상용 교우가 팔을 들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작지만 당당하고 용감한, 시금치를 먹고 초인적인 힘을 내는 ‘뽀빠이’. 유명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뽀빠이가 우리나라에서는 이 사람으로 통한다. 작은 체구에 다부진 몸을 자랑하는 한국판 ‘뽀빠이’이자 본교 응원단장을 지낸 이상용(임학과 63학번) 교우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연예계 원로로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75살의 나이임에도 누구보다 힘차게 사는 이상용 교우를 여의도 공원에서 만났다.

 

살아남기 위해 운동했던 젊은 날 
 이상용 교우는 자신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칭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그가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가족들이 갓 태어난 그를 산에 버렸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산 채로 산에 파묻혔어. 막내 이모가 구해준 덕분에 살 수 있었지. 아마 그 나이에 파묻히고 살아남은 사람은 몇 안 될 거야.”
 이상용 교우를 다시 낳은 건 그의 이모다. 산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그를 발견한 이모가 다시 꺼내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어머니의 젖이 잘 나오지 않았던 어린 아기는 온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먹고 자랐다.
 죽다 살아난 그였지만 어린 시절도 순탄치 않았다. 6살에 걸음마를 간신이 뗀 그는 체구가 왜소했고 어린 나이부터 성인병에 시달렸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생명력이 더 질긴 것 같기도 하고, 운동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는 11살부터 아령을 잡기 시작했다. 약한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몸을 단련하고 또 단련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서다.
 공부와는 먼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지만, 그는 강한 체력이 뒷받침됐기에 고려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고려대 들어갈 때 입학정원이 45명이었는데 47명이 시험장에 왔어. 두 명만 떨어뜨리면 되겠다고 생각했지. 공부는 잘하지 못했는데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은 덕분에 합격할 수 있었어.” 
그가 많은 대학 중에 고려대에 지원한 이유는 단순했다. 고려대의 마크가 멋있어서였다. “내가 고려대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마크가 빨간색이고, 용맹스럽고, 그 밑에 호랑이가 있어서였어. 그냥 거기에 단순히 이끌렸던 것 같아.”
 이상용 교우는 설렜던 합격 당시를 회상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합격 발표를 보고 싶었던 그는 꼭두새벽부터 학교에 달려가 합격 발표를 기다렸다. “그때는 대자보를 붙여 합격자 발표를 했어. 일어나보니까 내가 없어진 걸 보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합격통지서를 들고 가니까 온 가족이 기뻐했던 기억이 나.” 어렵사리 고려대에 입학한 그는 자신이 합격한 데에 남다른 자부심을 느꼈다. “집에 내려가는데 고려대 배지를 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나가는 선배를 붙잡고 대뜸 배지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빌려주시더라고. 한동안 배지를 달고 학교에 다녔었지.”

 

연세대 잠재운 ‘응원단장’ 이상용
 이상용 교우는 재학시절 응원단장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응원단 부원 중 응원단장을 선발하지만, 당시엔 응원단장을 따로 선발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응원단장을 여학생회에서 뽑았어. 여학생회관에 모아놓고 10분씩 발표를 시키는 거야. 내가 단상에 올라가서 몇 마디 했는데 웃기니까 나를 뽑은 거 같아.”
 응원단장으로 선발된 그는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응원을 주도했다. “내가 체격이 왜소하니까 아이디어로 대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내가 구호를 외치면 그걸 전교생이 따라 했고, 연세대 쪽은 조용해졌지.” 당시에 유행했던 프로레슬러 김일의 박치기나 훈민정음을 이용한 응원은 학생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기도 했다. 

나랏말싸미 고대 야구와 연대 야구와는 서로 실력이 사맛디 아니할 세

나오는 타자마다 삼진을 먹게 할 따름이니라…

 이상용 교우는 치열했던 당시 고연전과 응원문화를 떠올렸다. 당시 고연전이 끝나면 서울 시내 거리로 양교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주먹다짐을 벌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옛날에는 목숨을 걸고 응원을 했지. 야구장이든 축구장이든 끝나면 신촌, 안암, 을지로, 종로 가릴 것 없이 패싸움을 엄청나게 하곤 했어.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지금은 ‘입실렌티’와 ‘대동제’라는 축제가 따로 있지만, 이상용 교우가 재학할 당시엔 응원단이 연습할 때 자체가 축제였다고 한다. “우리 축제는 연예인 부르고 그런 게 아니었어. 응원단이 연습할 때면 지금 중앙광장 자리에 있던 운동장에 막걸리를 가득 채운 드럼통 30개를 깔아놓고 마음대로 퍼먹었지. 두세 시간쯤 지난 뒤에는 취해서 다 헬렐레해졌어. 하하.” 
 후배 응원단원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고대응원단은 좀 촌스럽고, 연대응원단은 호화롭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걸 좀 탈피해서 고대다운 응원, 용맹스럽고 진실하고 자유로운 응원을 펼쳐보면 좋겠어.” 그는 응원단이 선배들이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별명 ‘뽀빠이’
 그는 어떻게 방송 활동에 몸담게 됐을까. “임학과를 졸업하고 나니까 할만한 일이 없었어. 농림부에 가거나 산 지키는 일 하는 건데 내 성질에 그건 못하겠더라고.” 가만히 있는 걸 못 참는 그는 졸업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외판원 생활을 6년간 했다. 
 그러다 문득 방송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평소 사람을 웃기는 걸 좋아했고 사람들도 그런 자신을 재밌어하는 것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1973년 ‘유쾌한 청백전’이라는 MBC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계에 데뷔했다. “당시 피디가 고등학교 선배였는데, 처음엔 ‘대학교 나온 놈이 뭘 이런 걸 하냐’고 그랬어. 난 오히려 ‘그래서 해야 한다’고 선배를 졸랐지.” 이상용 교우가 진행한 ‘유쾌한 청백전’ 프로는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가 ‘뽀빠이’ 이상용으로서 첫발을 뗀 순간이었다.
 이상용 교우는 ‘뽀빠이’라는 자신의 별명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 “당시 뽀빠이 만화영화가 유행했는데 뽀빠이를 보니까 영락없이 나인 거 같았어. 작고 빠릿빠릿하고 근육이 좋아. 순간 ‘아, 이거로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 ‘뽀빠이’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누린 그는 자신의 별명 때문에 지금도 열심히 운동한다고 고백했다. “내가 비쩍 말라봐, 뽀빠이가 뭐 그러냐고 할까 봐 계속 운동을 해. 지금도 다른 사람들은 내가 웃통 벗으면 깜짝깜짝 놀라. 뽀빠이는 아직도 여전하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뽀빠이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75세의 나이지만, 이상용 교우는 철저히 자기관리를 한다. “운동을 열심히 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사람들이 아직도 나를 뽀빠이로 기억해줘. 물론 건강을 위한 것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매일 같이 운동을 해.” 그는 매일 새벽 3시에 기상해 독서를 한 뒤 헬스장에서 두 시간 반씩 운동을 한다.
 또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 베푸는 삶을 실천하기도 한다. “내가 어렵게 태어나서 그런지 어려운 사람을 가만히 못 봐. 지금 내가 잘사는 것도 아니고 집도 반듯하진 않지만 그래도 행복해.” 이상용 교우는 심장병에 걸린 어린이 567명의 수술을 지원했고, 군 위문도 4000번이나 다녀왔다. 그는 부족한 자신을 계속 찾아주는 사람들이 고맙다며 그에 대해 보답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을 아꼈다.
 모교에 대한 이상용 교우의 애정은 남다른 데가 있다. “한번은 김상엽 총장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위문을 하러 가라고 해서 다녀왔어. 공사장에 모래가 날리는데 한 200명이 모여서 ‘입실렌티 체이홉’ 교호를 외치고 교가를 수도 없이 제창했지. 그때만큼 고대에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어.” 그는 고대생 특유의 끈끈한 문화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상용 교우는 후배들에게 ‘고려대학교 배지를 달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라고 했다. 그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좇아가서 돕는 게 고대생’이라며 선배들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나가길 당부했다. “고대정신을 스스로 생산해서 항상 자기 발전에 힘쓰고 남을 돕는, 고대다운 고대생이 되면 좋겠어.”

 

글 | 맹근영 기자 mangrove@

사진│배수빈 기자 sub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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