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기억이란 자신이 겪은 경험이나 사건에 대한 강렬한 잔상으로 형성되고 보존된다. 사람들은 깊은 기억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일과 옅은 기억 탓으로 쉽게 잊어버리는 일을 두루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일의 경중과 기억의 강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때로 쉽게 지나쳐버린 일들이 한순간 기억의 표면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지 않는가.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때는 가능성으로 충만했는데, 하면서 아쉬워하기도 하고 또는 역으로 새로운 자신감을 가지기도 하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기억의 힘은 공동체 차원으로 승화되어 국가적 난경이나 위기 상황을 극복하게끔 하는 잠재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이러한 기대보다는 한국인 특유의 냄비 기질을 탓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는 큰 사건을 경험한 직후에는 열렬한 흥분과 감격을 누리고 표현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곧바로 무심한 일상 속으로 파묻혀 그때의 에너지를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난날의 비리를 반성하거나 단죄하는 힘도 약하고, 함께 누리던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애정도 금세 식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역사에는 아직도 해결의 장이 제대로 열리지 않은 분야가 많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한일관계가 가파르게 변화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산출된 문학적 성과들에 대한 반응들도 여러 갈래로 나타나고 있다. 대일협력의 상황논리적 불가피성을 내세워 친일 행적에 대한 관용과 선택적 망각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 저항의 논리를 보여준 이들을 통해 친일 행적을 반성적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입장이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해하려는 폭력성에 맞서서 자신을 지켜내려는 태도와 행동을 총괄하여 우리는 저항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본원적 가치에 충실하면 할수록 삶의 조건이 그것에 부합하지 않을 때 싸우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그만큼 저항은 상황적 비극성과 비판적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삼게 된다. 또한 그것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모든 폭력성에 대항하여 자신을 존재증명하려는 일련의 태도와 행동을 포괄하면서, 어떤 일방적 힘에 대한 반작용과 역동성(逆動性)을 핵심으로 삼는다. 그 점에서 우리 안에는 제국이라는 폭력적 타자에 맞서 숱한 반작용과 역동성을 보였던 그간의 엄혹한 역사가 강렬한 기억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한용운, 이상화, 김소월, 정지용, 심훈, 이육사, 임화, 윤동주, 오장환, 조지훈 등이 일제강점기에 보여준 가열한 저항의 언어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살펴져야 한다. 저항의 맥락을 키운 건 제국이 저지른 폭력이었고, 그러한 척박하고 외로웠던 시대가 혼을 울리는 가작들을 산출하게끔 해준 토양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은 전쟁으로 치달았던 일제말기에도 저항의 맥락이 줄기차게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증명되는데, 그 역사적 실상은 지금도 우리의 소중하고도 어엿한 정신적 자산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강렬한 기억과 손쉬운 망각의 악순환을 끊으면서, 중요한 역사적 마디에서 경험한 순간들을 계승 혹은 반성해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일제강점기나 독재시대의 폭력을 쉽게 잊는다든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그 주역들이 치른 희생들을 쉽게 잊는다든지 하는 역사에 대한 결례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의 기억을 형상화하고 남기고 보존하는, 문학이 하는 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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