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59일은 특별한 날이다. 1945년 이 날 소련은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아 2600만 명이 희생된 전쟁을 끝마쳤다. 피와 눈물로 침략자에 맞서 나라를 지켰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감회가 가감 없이 드러나는 이 승전기념일은 러시아를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시민들이 참전자 가족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불멸의 연대이다. 어느 가정이나 전쟁에서 싸웠던 이가 있기에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다. 내가 살던 뻬쩨르부르그에서만 올해 100만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훈장이 빛나는 제복 차림의 노인들이 앞서면 대로 양변에서 만세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뒤따르는 시민들은 엄숙히, 때로는 흥겹게 노래하며 걸어가고, 이후 광장에선 참전용사들이 남녀노소로부터 꽃과 감사의 말을 받는다. 국가의 주도가 확고한 나라에서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낸 이 놀라운 축제는 전쟁의 기억이 러시아인들에게 가지는 의미를 보여주었다. 때로는 과하게도 비춰졌던 이들의 민족주의와 애국심, 미국과의 대립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이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전승절의 모습이 오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러시아 현 정권은 크림 합병과 같은 민족주의적 의제를 독재의 연장에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멸의 연대는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전쟁의 비극을 되새기고 평화를 지키는 길일까, 아니면 왜곡된 영광에 취해 스스로 옛 적의 모습을 답습하는 길일까.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며 러시아인들이 전쟁의 기억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승화시키기를 기도해 보았다.

 

이병엽(문과대 영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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