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공벌레(이제니)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
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
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
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
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
했다.


  삶은 질문의 연속이다. 옳고 그름은 온전히 인간의 판단에 달려있기에 함부로 타인의 삶에 잣대를 들이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관대하지 못한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삶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종의 자기검열인 셈이었다.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어려운데 스무 살에는 무엇을 해야지, 서른 전에는 그래도 이걸 해봐야지 같은 남의 말에 대꾸할 여력이나 있었을까. 타성에 젖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옳은 맞춤법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틀린 맞춤법과 타인의 맞춤법으로 난도질된 조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래요. 동화 ‘개미와 베짱이’가 떠오르는 이 말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데아와도 같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삶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며 하고 싶지 않은 일들과 더부살이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허무함, 스스로에 대한 원망 같은 것들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서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나는 <밤의 공벌레>에서 생명력을 지닌 존재는 강인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지금은 잠시 그늘에 머물더라도 언젠가 다시 도약할 존재들에게 소소하게나마 응원을 보낸다.


홍수연(미디어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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