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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의 시선(詩選)]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고대인의 시선(詩選)]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 고대신문
  • 승인 2019.09.22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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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문태준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쯤 외시곤 당신의 등 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궂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처럼 소스라치시며

남세스러워라, 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왼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와 석류꽃과 뻐꾸기와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치마에 그만 함께 폭 싸였습니다


  올 가을 할머니의 갈비찜은 유난히 짜다. 반 그릇 정도만 밥을 비운 채 젓가락을 내려놓는다.할머니댁에서 유년 시절의 절반을 보낸 나에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푸짐한 잔칫상과 함께 남아있었다. 명절마다 고아주시던 곰국, 고구마와 함께 주시던 동치미, 나를 위해 몇 날 며칠을 삶으셨다는 감주. 하나뿐인 꼬마 손주가 이리 씩씩하게도 먹으니 할머니도 요리하는 재미를 조금은 느끼셨으리라.

  어느샌가부터 할머니의 간은 점점 짭쪼름해져가고, 당신은 하실 수 있는 것들 대신 하실 수 없는 것들을 말씀하신다. 손과 허리에 힘이 없어 설거지를 하지 못하시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눈빛 안에는 어떤 뭉클한 미안함이 서려있다. 대신 할머니는 할아버지 몰래 서랍에 숨겨두시던 꼬깃한 종이봉투를 매번 내 손에 억지로 꼭 쥐어주던 것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고맙고 미안한지, 왜 당신이 항상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건강이 아니라 우리들에 대한 그리움뿐일까.

  할머니가 다음 달에 수술을 하신단다. 앞으로 할머니의 갈비찜은 더 짜지고, 어쩌면 이 갈비찜을 언젠가는 먹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 내가 보았던 푸르고 높은 하늘을 할머니는 보지 못하셨을 텐데. 사진에 담아 보내드릴까, 아니면 할머니와의 사진을 하나라도 더 남겨두어야 하나. 내려놓았던 젓가락으로 일단 할머니의 갈비찜 한 점을 입 안 가득 넣는다.

조성준(정경대 경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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