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걱정 마세요. 당연히 봐줘야죠.” 전화 너머로 고모를 안심시키는 엄마 목소리. 얼떨결에 고3 사촌의 자기소개서가 내 손에 들렸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려 뛰어다녔을 동생의 모습이 선명했다. ‘이를 통해 무엇을 느꼈습니다로 이야기를 만들고, 진로와 대학에서의 계획으로 마무리 짓는 자소서. ‘기자가 돼 사회를 바꾸겠습니다라며 확신에 찬 모습이 왠지 부러웠다. 2년 전 자소서를 쓰던 내 모습도 다르진 않았다. 고교 1학년 말, 생활기록부 진로희망사항에 방송 연출가 와 사유를 쓴 후부터는 진로를 향한 열정을 보여줄 활동을 찾고, 그와 어울리는 책을 읽었다. 자소서 역시 당찼다.

  수능이 가까워질 즈음, 공부하던 펜을 온종일 내려놓는 날도 있었다. ‘연출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일까?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고민하다 종소리가 울렸다. 야자가 끝날 때까지도 텅 비어있는 스터디 플래너를 보고서야 결론이 나왔다. 입시를 생각하면 진로를 바꿀 순 없으니, 대학 입학 후에 천천히 생각하면 된다고.

  대학 친구들은 학과가 생각보다 맞지 않아 진로가 걱정된다고 입을 모은다. 눈앞 마네킹이 입은 옷을 구입해도, 막상 집에 와 입으면 어울리지 않기 일쑨데. 고등학생이 상상 속에서 설계한 진로가 완벽할 수 있을까. 대학생이 된 후, 다들 한 번쯤은 진로를 다시고민하는 듯하다. 하지만 다시고민하기에, 관성은 생각보다 셌다. 수십 번 읽었던 자소서 내용이 자꾸 떠오르고, 애써 입학한 학과를 거스르긴 아쉬웠다. 다른 학과 교양수업을 들어도 그저 남의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사막의 유목민들은 밤에 낙타를 나무에 묶어둔다. 그런데 아침에 끈을 풀어도 낙타는 도망가지 않는다. 지난밤 기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해서다. 소속 학과, 그동안 해온 수많은 활동, 굳게 믿고 구분 지었던 내 성향. 이들은 다른 진로로 걸음을 틀어볼까 고민하는 나를 주저하게 하지만, 사실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대학생 사춘기. 합격을 위해 고민의 끝을 유보한 어린 사춘기보다는 성숙해보려 한다. 알껍데기를 깨야만 세상에 진짜 날개를 펼 수 있으니.

최현슬 기자 puri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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