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은 이들의 일상에서 지워졌지만, 오늘날 무형문화재로 불리는 것들은 200여 년 전만 해도 삶의 일부였다. 질박한 옹기그릇에 담긴 고봉밥으로 하루를 버티고, 흥겨운 탈춤 한바탕에 꼴사나운 양반 놈들 비웃어주기도 했다. 한 많은 삶의 잔잔한 위로였고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에겐 박물관 구경 가듯 그저 잠깐 스쳐 가는 옛날 일이 돼버렸다.

 과거의 우리 것이 더 이상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하지만 전통을 사랑하고 그 명맥을 잇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전통문화는 미래 세대까지 향유하는 문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을 중심으로 무형문화재를 현대의 감각과 접목해 다양한 세대에게 선보이는 노력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교육, 문화, 공연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 전통문화의 부흥을 위해 노력 중인 현장을 담아봤다.

 

직접 만든 탈 쓰고 얼쑤 좋다!’

 한국문화재재단 중학생 문화유산 자유학기제 프로그램

 교과서에선 탈춤이 시험 범위일 뿐이지만, 직접 보고 듣는다면 신명 나는 놀이가 된다. 문화재청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자유학기제 대상 학년인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탈춤을 비롯한 우리 무형문화재를 체험해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20일에는 경희중학교 학생 20여 명을 대상으로 탈 만들기 및 탈춤 체험교육이 진행됐다.

 본격적으로 탈을 만들기 전, 선생님으로 나선 봉산탈춤(국가무형문화재 제17) 김은주 이수자는 탈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춤을 출 때 탈을 왜 썼을까요?” 재잘재잘 떠들던 학생들의 입에서 온갖 이유가 오고 간다. “신분을 숨기려고요!” 정답을 맞힌 학생에게 향하는 열렬한 박수, 학생들의 눈이 더욱 반짝거리는 순간이다.

직접 만든 탈을 쓴 아이들이 탈의 웃음 모양 그대로 빙그레 웃고 있다.
직접 만든 탈을 쓴 아이들이 탈의 웃음 모양 그대로 빙그레 웃고 있다.

 딱히 주제는 없어도 민무늬 종이 탈에 손 가는 대로 색색의 클레이를 붙이고 나면 기발한 탈들이 하나둘 만들어진다. 만화가가 꿈인 김현준(·14) 군은 초록색과 파란색 클레이를 섞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청록색 점박이 탈을 만들었다. “처음 탈을 만들어보는데, 학교 밖에서 이렇게 탈을 만드는 게 재밌어요.” 뿔도 붙이고 귀도 붙이고, 학생들이 빚어낸 저마다의 탈들은 익살맞은 모양새였다.

 곧이어 강당으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탈춤을 출 준비를 한다. 탈춤 공연에 쓰이는 타령장단을 직접 장구로 쳐 보는 시간, 가뜩이나 손에 익지 않은 장구채를 손에 쥐고 장구를 두드려본들 선명한 소리가 나지 않는다. 당황한 표정이지만 어설픈 손놀림으로 만드는 흥겨운 장단이 강당에 콩콩 울려 퍼진다. “-기덕-덕 쿵-기덕-. 친구는 조금 마음이 급하네. 그래도 잘했어요!”

색동 한삼을 낀 아이들이 장단에 맞춰 힘차게 두 팔을 흔들고 있다.
색동 한삼을 낀 아이들이 장단에 맞춰 힘차게 두 팔을 흔들고 있다.

 이제 장단도 쳐봤으니, 진짜 춤을 출 차례다. 양손에 색동 한삼을 끼고 강당에 일렬로 선 학생들은 기다란 한삼이 신기한지 팔을 이리저리 휘두른다. 기마 자세는 탈춤의 기본이라, 다리에 힘을 딱 주고 한삼을 S자 등 여러 모양으로 흔드는 동작을 연습한다. 통통 튀는 것 같은 탈춤 동작에 수줍은 학생들은 짐짓 머뭇거리다가 직접 만든 탈을 쓰고 나서는 아무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신나게 몸을 흔든다. 전에 축구를 하다 다리를 살짝 다친 이태규(·14) 군은 춤을 추고 있는 친구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원하게 웃었다. “한삼이 하늘하늘 움직이니까 춤이 멋진 것 같아요!”

 김은주 이수자는 이러한 체험교육이 탈춤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 된다고 말한다. “처음엔 수줍어서 잘 못하다가도 어느 순간 탈춤에 깊게 빠져드는 학생들이 있더라고요.” 김은주 이수자는 교과서로 배우는 탈춤이 공부에서 끝나고 만다는 아쉬움에 학생들에게 직접 탈춤을 가르치는 순간 더욱 열정을 다한다. “이렇게 탈춤을 직접 배울 기회가 많아지면, 이 중에서 장차 우리나라 민속 예술계를 이끌어나갈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요?”

 

일상이 단청으로 물들 때까지 

전통 단청의 대중화 - 한효문화재

 붉을 단과 푸를 청, 단청(국가무형문화재 제48)은 전통 건축물의 벽체, 기둥, 천장 등을 화려하게 채색하는 방식이자 문양 자체를 뜻한다. 과거 단청이 궁궐과 사찰 등을 화려하게 밝혔다면 지금의 단청은 평범한 일상에 싱그러움을 더할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한효문화재(대표=전한효)는 전통 단청에 현대적 감각을 덧입힌 생활용품을 통해 단청의 현대화와 동시에 대중화를 모색하고 있다.

 한효문화재의 대표 전한효 씨는 20년이 넘는 경력의 단청기술자다. “원래 처음부터 단청을 전공했던 건 아니에요. 의상 디자인을 전공해서 디자인에 쓰일 문양을 찾으러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사찰 건물을 채색하는 단청에 관심을 두게 됐어요.”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해 단청 관련 전문지식을 쌓고, 단청기술자 자격증도 취득한 전한효 대표는 경복궁 자경전, 향원정 등 궁궐과 사찰의 단청 작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전통가옥들이 많이 사라진 오늘, 단청이 꽃필 수 있는 영역은 한정적이었다. “요즘 들어 전통가옥을 많이 짓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단청이 쓰일 다른 분야를 자연스럽게 찾게 됐어요.” 전한효 대표가 찾은 분야는 단청 문양을 활용한 문화상품 제작이었다.

 

한효문화재에서 만든 단청문양의 스카프, 커튼, 장식 등이 전시된 모습 사진제공│한효문화재
한효문화재에서 만든 단청문양의 스카프, 커튼, 장식 등이 전시된 모습
사진제공│한효문화재

 2016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을 통해 처음 한효문화재를 창업한 이후, 전한효 대표는 지금까지 만다라 스카프, 발 커튼, 인테리어 장식 등을 제작했다. 과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단청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만큼, 단청에는 한국 전통 문양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다. “단청 문양은 현대의 문양들과 견주어 봐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단청문양 채색을 다 마친 이수용 씨는 자신의 작품에 손녀 이름을 새겼다. 두경빈 기자 hayabusa@
단청문양 채색을 다 마친 이수용 씨는 자신의 작품에 손녀 이름을 새겼다.
두경빈 기자 hayabusa@

 현재 한효문화재에선 창덕궁 앞 도성 한복판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지역 주민들과 단청 문양을 활용한 문패와 도로명 주소 번호판을 만드는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활동에 참여한 주민들과 나무판에 단청 문양을 그리는 연습을 하는데, 오방색으로 피어나는 단청의 아름다움에 주민들 간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다. 단청 문양을 모두 그린 다음 이수용(·63) 씨는 여백에 손녀 이름을 새겼다. “너무 예뻐서 손녀가 좋아할 것 같아요. 단청 그리는 법을 다 배우고 나면 집 꾸밀 때도 써먹어 봐야죠.” 이런 소소한 노력이 모여 전통단청이 우리의 일상에 녹아드는 건 아닐까.

 전통에서 일상으로, 단청의 아름다움을 전파하는 전한효 대표에게도 단청 문양의 현대적 변용은 여전히 과제다. 새로운 세대의 감각에 맞게 문양을 재해석하는 과정은 단청을 대중화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환갑을 넘긴 나이에 젊은 세대의 감각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예술대학에서 단청문양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과정이 있으면 좋겠어요. 젊은이들이 직접 단청을 현대화하는 게 단청의 미래를 생각하는 데 있어 최선이 아닐까요?”

 

입과 손이 하는 일을 모두가 알게 하리라

 판소리 공동창작집단 - 입과손 스튜디오

입과손 스튜디오의 판소리 동화 시리즈 중 영감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의 한 장면이다. 사진제공│입과손 스튜디오
입과손 스튜디오의 판소리 동화 시리즈 중 '영감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의 한 장면이다.
사진제공│입과손 스튜디오

 신이 내린 듯한 소리꾼의 구성진 가락과 고수의 살아있는 북 장단. 세대를 거듭해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의 절묘한 가락은 여전하지만, 그들이 자아내는 희로애락에 전율을 느끼며 얼씨구, 좋다를 외치는 민중들의 존재는 어느새 희미해졌다. 전통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고문체의 말투가 지금의 세대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나머지, 자막을 달지 않고선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에 젊은 소리꾼과 고수들이 과거에 멈춰버린 판소리의 시간을 흐르게 하기 위해 뭉쳤다. 판소리 공동창작집단 입과손 스튜디오다.

 2017년 소리꾼의 과 고수의 이 모여 결성된 이후, 입과손 스튜디오는 기획부터 창작까지 소리꾼과 고수가 공동 작업을 진행하며 다양한 창작 판소리를 만들어왔다. 전통 판소리를 현대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하는 완창 판소리 프로젝트동초제 심청가부터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와 같은 문학작품을 판소리로 재해석하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최근 활발한 공연을 이어나가고 있는 판소리 동화 시리즈안데르센에선 소리꾼과 고수의 역할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구성이 더욱 눈길을 끈다. ‘판소리 동화 시리즈 안데르센은 안데르센의 동화 영감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 ‘미운 오리 새끼를 판소리로 재창조한 작품이다. 동화를 판소리 소재로 삼은 건 어린 관객층에 판소리를 재밌게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그 노력은 공연에 쓰인 다양한 악기, 소품에서도 드러난다. , 꽹과리 같은 전통 악기뿐만 아니라 캐스터네츠, 아코디언 등 20여 개가 넘는 악기들로 풍부한 배경음악을 연출했다. 입과손 스튜디오에서 고수로 활동하고 있는 이향하 대표는 공연 중에 북부터 아코디언, 실로폰까지 수십 개의 악기를 사용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보는 공연이니까 학교 수업 때 쓰는 트라이앵글, 멜로디언이 공연에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공연 내용에 맞게 모자, 자전거, 확성기 등 소품을 다양하게 사용하며 공연의 흥미를 더했다.

 처음이라 생소하지만, 익숙한 것들로 꾸며진 판소리의 향연에 공연을 보는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하다. 중간에 집중력을 잃고 소리를 질러도 얼쑤추임새를 더한 듯 공연의 흥은 살아난다. 공연 중간중간 어린 관객들의 호응을 구하는 소리꾼의 몸짓에 목청 좋은 아이들은 연신 좋다를 외치며 추임새를 넣는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많은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이들이 만들어가는 것은 분명히 전통 판소리의 연장선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을 보다가도 일순간 소리꾼의 구슬픈 창과 웅장한 북소리가 천장을 찌르면 감상 어린 추억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판소리 창작을 하기 위해선 그만큼 전통 판소리도 잘 알고 있어야 해요. 전통 판소리를 사랑하는 만큼, 창작 판소리를 통해 전통 판소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세대를 아우르고, 오늘의 문화를 아우를 수 있다면 판소리는 과거의 문화가 아니다. “판소리의 변화는 무궁무진해요. 판소리가 하나의 장르로 살아남도록 계속해서 좋은 공연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글 | 이선우 기자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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