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7 19:38 (월)
디지털 시대의 한글서체, 도전적이고 자유로워지다
디지털 시대의 한글서체, 도전적이고 자유로워지다
  • 김예정 기자
  • 승인 2019.10.06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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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을 넘어 문자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미지를 입히는 서체. 한글만의 독특한 문자체계와 과학성을 다채롭게 드러내는 한글서체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가독성과 심미성, 그리고 모든 디자이너와 사용자의 다양한 의미부여 속에서 한글서체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디지털 환경에서 고전한 한글서체

  1980년대 후반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국내에도 본격적인 디지털 활자 시대가 열렸다. 컴퓨터에 담을 수 있는 여러 글자 모양이 개인 사용자의 선택지뿐 아니라 편집 디자이너의 주요 도구로 활용되며 한글서체의 수요가 급증했다. ‘산돌커뮤니케이션’, ‘윤디자인연구소와 같은 전문 서체개발 회사들이 등장한 가운데 1991신명시스템즈가 최초의 디지털 한글서체인 ‘SM명조를 내놓은 후, 국가기관이 한글서체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0년대에 이르러선 글꼴을 통해 기업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용 서체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한글서체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해왔지만, 한글서체 개발자들에게 개발상의 어려움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글서체 시장 규모를 연 500억 원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서체산업이 활성화된 일본(2000억 원)이나 미국(3000억 원)에 비해 크게 적은 수치다.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외국문자와 다른 한글만의 조형적 특수성이 지목된다. 이근형(계명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대부분의 한글서체가 네모 틀 안에 낱자를 한 자씩 그려 미려한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완성형 방식으로 디자인된다모든 경우의 수를 조합하면 총 11172자가 필요한 본문용 서체 한 벌을 만든다는 것은 물리적 작업량이 많아 매우 고된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홍현보 한국글꼴개발연구원 간사 역시 한글서체는 같은 이라도 그 위치와 조합된 중성(모음)의 종류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디자인돼야 해 개발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한 한글서체가 디지털 환경에 온전히 구현되는 데는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글은 다른 문자와 달리 글자에 따라 획 개수의 차이가 커, 같은 크기의 네모 틀에 넣었을 때 시각적으로 같은 무게가 느껴지도록 속 공간을 세밀하게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디지털 환경에서는 미세한 세리프(serif)의 적확한 표현에 한계가 있어 글자 외곽에 서체 정보를 추가 입력하는 힌팅(hinting) 작업도 필요하다. 2017년 한글 세리프 서체로서는 최초로 웹 전용으로 제작된 이롭게 바탕체PC, 모바일, e-book을 포함한 모든 디지털 환경에서 가독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글자에 힌팅 작업을 진행했다.

  다만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에 따라 디스플레이 환경이 개선되며 이러한 어려움이 점차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양장점 장수영 디자이너는 “4K, 8K 등 고해상도의 제품들이 개발되며 화면 출력이 인쇄 품질에 가까워지고 있다기기들의 단가가 낮아지고 대중화가 진행되면 해상도로 인한 맹점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체의 다양성과 확장성에 주목해야

  서체가 구현되는 환경과 디자인적 가치가 다변화되는 시점에서, 전문가들은 한글서체의 확장과 다양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5월 산돌커뮤니케이션이 공개한 산돌 정체는 대부분의 본문용 서체 토대인 고딕과 명조의 테두리를 넘어서며 본문용 서체의 다양화를 보여줬다. 이지원(국민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는 같은 굵기에서도 산돌정체530은 펜글씨, 산돌정체630은 붓글씨에 가까운 느낌으로 질감의 차이까지 구분된다제목과 본문 등 사용 환경에 따라 두께나 기울기 변화 정도만 가능했던 서체 가족군의 범주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체 가족군의 다양화는 최근 서체 디자인계의 화두인 배리어블 폰트(variable font)’로 가속화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가족군을 제공하기 위해선 기준 서체를 만들었던 과정 그대로 한 자, 한 자 작업이 필요해 그 종류에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AI기술로 기본 서체의 굵기, 기울기, 세리프 모양을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쉽게 조절하는 배리어블 폰트 기능을 활용해 가족의 수를 쉽게 늘릴 수 있을 전망이다.

  최근 서체개발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독립 서체디자이너의 활동도 증가하며 서체 스타일의 개성도 다양화되고 있다. 현역 서체디자이너들이 운영하는 사설 타이포그라피 교육기관이 체계화되고, SNS상에서 사용자와 직접 소통 하게 되면서 독립 서체디자이너들이 활발히 활동할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장수영 디자이너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디지털 매체를 통해 서체 디자인 작업물을 올리는 등 한글서체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새로운 한글 조형에 대한 실험적인 작업도 다수 포함돼 한글서체가 양적, 질적으로 점점 풍성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직접 서체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다는 현승재 디자이너는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드는 본문용 서체개발에서는 기존 서체개발 회사의 경쟁력이 앞서기 때문에, 아예 조형적이고 주목적인 제목용 서체를 주로 디자인한다고 자신의 주력 분야를 소개했다.

  사용자들도 한글서체의 확장성에 공감하고 있는 분위기다. 스트라이크디자인 김장우 대표는 최근 한글서체 디자인이 추구하는 가독성과 심미성의 기준이 변화하고 있다제목은 크고 본문은 작아야 하는 등 정형화된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안하는 디자인이 많이 나와 표현의 폭이 넓어진다고 전했다. 이지원 교수 역시 궁극적인 서체 디자인의 목표가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표현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을 향하고 있다“VR환경에서는 입체적인 서체로, 메신저 환경에서는 상대에 따라 각기 다른 서체로 자유롭게 감성 을 표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서체 저작권 의식 선행돼야

  최근 디자이너들에게 주목받는 서체개발의 창구는 크라우드펀딩이다. 이용제 디자이너의 바람체’, 서체 스튜디오 양장점의 펜 시리즈등은 예비사용자들의 후원을 받고 서체를 제작하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성공적인 개발의 사례다. 다양한 사용자의 피드백을 반영할 수 있으며 개발에 드는 만만찮은 자금을 일부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많은 서체디자이너들이 크라우드펀딩을 선택하고 있지만, 체계화된 유통 플랫폼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현승재 디자이너는 크라우드펀딩하에서는 사용자들이 트렌드나 인지도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다개발 환경의 지속적인 개선을 위해선 서체의 유통과 판매 구조가 더욱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글서체 저작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 또한 선결돼야 할 과제다. 컴퓨터프로그램으로서 창작성을 인정받아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폰트파일과 달리 현행법상 서체 도안은 디자인보호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문제는 서체 도안이 저작물성을 인정받지 못하기에 인쇄된 서체 도안을 스캔 복제해 유사한 폰트 파일을 얼마든지 재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디자인보호법은 글자체 디자인 자체를 생산, 양도, 대여하는 등의 실시행위만을 디자인권 침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류시원 법무법인세종 변호사는 재생산된 폰트 파일을 구성하는 제어점과 윤곽선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어서 원본 폰트가 모방자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비슷한 모양의 폰트가 법적 제재 없이 시장에 중복해 유통된다면 창작의 인센티브가 감소해 산업발전이 저해될 것이라 우려했다.

  일반 사용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무료 폰트가 배포되는 상황에서 사용자와 저작자 간 소통의 필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2018년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발표한 무료 한글 폰트에 대한 20대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5%폰트 저작권은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특히 무료라는 사실만 본 후 정확한 사용범위를 확인하지 않고 폰트를 사용하면 이용약관을 위반할 수 있다. 유길상(정보창의교육연구소) 교수는 저작자는 무료 허용범위를 이용자가 직간접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이용자는 폰트 개발이 긴 시간과 고민을 통해 만들어진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용범위를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한글서체, 그 창작성에 적절한 가치 인정이라는 날개가 달린다면 더 높은 차원으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예정 기자 breeze@

일러스트송유경 기자 c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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