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된 서체디자이너의 지난한 인고와 고민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는 한글 서체 한 벌. 최은규 박윤정앤타이포랩 이사는 20년이 넘게 서체 디자인에 매진하며 널리 사랑받는 본문용 서체와 전용 서체를 개발해 왔다. 장인의 공을 들여 만드는 11172, 그 과정이 특별해 서체디자이너의 길을 걷고 있다는 최은규 이사를 만나 서체 개발의 현장을 엿봤다.

 

- 서체디자이너로서 지향점은 무엇인가요

  “모든 서체디자이너와 사용자가 생각하는 서체 디자인의 목표는 각기 다르겠지만, 본문용 서체디자이너로서 개인적인 지향점은 사용자가 편리한 서체를 만드는 것이에요. 여기서 사용자란 글을 읽는 독서가 또는 편집디자이너인데, 각각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일단 선택의 폭이 자유롭고 넓어야 하죠.

  한글 디지털 폰트는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개발돼 양은 많지만, 정작 편집디자인에 사용되는 폰트는 아직도 제한적이에요. 편집디자이너들이 제목, 본문 및 여러 환에서 원하는 표현을 하기 위해선 자유롭게 선택해 사용할 수 있는 글자 가족이 지속적으로 개발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향후엔 기술의 도움을 받아 폰트 개발의 시간적 부담을 줄여 글자 가족의 범위도 두께, 내부 공간, 세리프의 차이를 넘어 더욱 확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 디자이너이자 사용자로서 어떤 서체가 특별하게 다가오나요

  “디자이너로서는 2017년부터 지금까지 작업하고 있는 ‘Tlab 돋움에 특별한 애정을 주고 싶어요. 시간이 흐르며 사용 환경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서체 개발은 한번 완성됐다고 해서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없어요. 1995년 윤고딕1002012년 윤고딕700을 작업하고, 계속 발견하게 되는 보완점을 기반으로 총 20종의 본문용 돋움 가족군을 공들여 개발하고 있어요.

  독서를 하는 일반 사용자의 입장에선 너무 튀거나 방해되는 요소가 큰 글꼴보다는 두 께, 획의 기울기, 돌기의 정도, 자소의 크기가 적당한 서체를 좋아해요. 불필요함을 배제한 디자인이 특징인 ‘Tlab dALL02’가 눈에 피로를 주지 않아 특히 좋은 것 같아요.”

 

- 본문용 서체 디자인에서 어떠한 요소를 중 점적으로 고려하나요

  “같은 계열의 다른 서체와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정체성이 있는지 우선적으로 확인해요. 아무래도 본문용 서체는 제목용 서체 보다는 디자인에 제한이 있어 유사성을 최대한 피하고 변별력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죠.

  가독성과 심미성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후에도 여러 부분을 추가로 고려해요. 특히 본문용 서체 개발에서는 서체 가족군 두께 테스트로 제한된 시간 내에서 최적의 두께 단계를 선택해야 하죠. 한글과 영문 및 특수 문자 등의 조판 테스트로 크기, 글줄 자간 등의 문제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자소 ’, ‘등의 꼭지를 세울지 결정하는 것도 서체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요.”

 

- 시력 약자를 포함한 모든 사용자를 위해 탄 생한 ‘Tlab dALL01’은 어떻게 개발하게 됐나요

  “서울시 예비사회적기업인 디올연구소와 공동으로 개발한 ‘Tlab dALL01’은 유니버셜 디자인의 관점에서 서체를 통해 모든 사용자의 독서환경을 개선하고자 한 시도였어요. 개발 과정에서는 시력 약자를 포함한 서체 사용자들의 인터뷰와 조사 및 사용성 평가를 통해 온·오프라인 환경에 따른 사용자의 인지적, 신체 기능적 특성을 파악해 디자인에 반영했죠. 개인적으로도 사용자 대상의 수많은 테스트를 실제로 적용하며 결과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디자인의 주안점은 작은 크기에서의 변별력이에요. 최소 크기 6pt를 기준으로 온·오프라인 환경에서 뭉쳐 보이거나 얇아 보이지 않는 두께를 찾았고, 군더더기 없고 자모음의 크기가 균일한 산세리프계열의 한글 돋움으로 디자인했죠. 특히 작은 크기 에서 번짐 현상이 생긴 볼드(Bold) 단계에서는 획이 맞닿는 부분에 흠을 내는 장치인 잉크트랩을 적용해 뭉개짐을 방지하고자 했어요. 반대로 제목용으로 큰 크기에서 최적화된 서체도 개발계획에 있습니다. ‘Tlab dALL01’ 역시 기능성 폰트로서 앞으로 한 단계 더 진화해야 하겠죠.”

 

- 다변화되는 디자인 환경과 가치 속에서 주목할 만한 서체의 경향성은 무엇인가요

  “많은 기업과 기관에서 각각의 정체성을 담아 전용 서체를 개발해왔고, 그 사례가 많아지며 전용 서체는 제목용 서체 개발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됐어요. 그런데 과거의 전용 서체가 마케팅 측면에서 기업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디자인을 더했다면, 최근의 전용 서체는 더 나아가 각 콘셉트, 즉 서체를 적용하는 환경에 어울리는지를 더 중요하게 고려해 디자인됩니다. 전용 서체도 디자인작업물에 사용되는 표현 도구로써 가치가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 한글 서체 디자인 산업의 현황은 어떤가요

  “최근에는 학교뿐 아니라 사설 클래스에서도 교육이 활발히 이뤄져 예전보다 서체 디자인에 입문하기 비교적 쉬워졌어요. 접근성이 좋아지며 전문 디자이너가 아닌 일반인도 서체 한 벌을 디자인하는 데 도전하고, 이로 인해 개발되는 서체도 많아지고 다양화되고 있죠.

  또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로의 진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요. 한글과 영문버전의 개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국어 서체와 혼용할 시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서체가 많아지고 있어요. 타이포랩의 서체의 경우 네덜란드 서체 플랫폼인 폰트스탠드에서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현지 디자이너가 한글로 된 디자인작업물을 만들 때 환경적으로 더 적절하고 다양한 한글 서체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죠.”

- 한글 서체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도전과제가 있나요

  “사실 디자인 현장에 있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인 것 같아요. 한 벌의 한글 서체가 탄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한 명의 서체디자이너가 되기까지도 개인과 회사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서체 디자인 이론과는 별개로 실무에서의 긴 작업과 정은 또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경력이 긴 폰트디자이너는 그리 많지 않아요. 작업만 을 바라보며 계속해 실무 현장에 있는 것 자체가 제겐 도전이고 즐거움인 것 같아요(웃음).”

글 | 김예정기자 bre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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