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럼의 마녀들'(2011) 로절린 섄저
'세일럼의 마녀들'(2011)
로절린 섄저

 로절린 섄저의 <세일럼의 마녀들>(2011; 김영진 옮김, 서해문집, 2013)은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세일럼의 마녀재판’(Salem's Witch Trials)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르포르타주이다. 1692년 미국의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이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마녀사냥이라는 광풍이 몰아쳐 마을 사람들은 서로서로 마녀로 고발한다. 무고하게 고발당한 사람들 중 19명이 마녀로 몰려 교수형을 당하면서 비극적인 사건은 끝난다. 끝났다기보다는 덮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다. 후유증은 훨씬 더 오래갔다. 사실 마녀로 몰려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도, 청교도 공동체가 붕괴되어 이웃끼리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벽이 더 심각했다.

 세일럼의 마녀사냥은 표면적으로는 마을 사람들 간의 종교적 갈등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전통을 고수하던 집단과 새로운 상업계층 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벌인 갈등과 투쟁이다. 거기에 마을 사람들 사이에 개인적인 증오와 원한이 더해졌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은 토지 문제로 인해 이웃 간에 많은 분쟁이 발생해 이웃끼리 서로서로 고발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따라서 이웃 간의 불화가 심했고, 게다가 위생 상태가 안 좋아 유아 사망률이 높았다. 아이가 없거나 아이가 죽은 이들은 아이가 있는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교과서적으로 말해 역사를 배우고 기록하는 이유는 과거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예컨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마녀재판은 1950년대 매카시즘이라는 형태로 재현된다.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이 휘몰아치던 1950년대 전도가 유망하던 수많은 젊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숱하게 희생되었다. 냉전이 본격화되던 당시에 가치 중립적인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는 마녀와 동일한 의미와 맥락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 예술가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들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이 놓여 있다. 개인적인 양심을 지키기 위해 동료의 이름을 말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신의 예술을 위해 동료의 이름을 말하거나.

 극작가 아서 밀러는 과거 공산주의에 동조했던 동료의 명단을 제출하라는 의회의 명령을 거부했다. 반면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연극연출가 엘리아 카잔과 밀러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극작가 클리퍼드 오데츠는 매카시즘 광풍에 떠밀려 결국 과거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동료의 명단을 제출한다. 그 외에 월트 디즈니, 나중에 대통령에 오르게 되는 로널드 레이건 등도 자신이 알고 있는 공산주의자 명단을 제출한다. 물론 카잔과 오데츠, 디즈니와 레이건의 선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어쩔 수 없이 동료의 명단을 넘겼다면, 후자는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동료를 팔아넘겼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미국 문화 예술계를 갈등과 투쟁의 장으로 만들었던 매카시즘은 실체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매카시즘 광풍을 보면서 역사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반복된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밀러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과거에 공산주의에 동조했던 동료의 명단을 제출하라고 명령 아니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양심에 따라 동료의 명단 제출을 거부한다. 그 때문에 밀러는 예술 활동이 제한되고, 심지어 의회 모독죄로 기소된다. 결국 그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밀러 개인적으로나, 사회와 국가적으로나 치유되기 힘든 비극적 사건이다. 밀러는 극작품 <시련>(1953)에서 세일럼의 마녀재판과 매카시즘의 유비를 통해 개인의 양심이라는 문제에 대해 숙고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카잔은 부두 노동자 노조의 불법 행위를 고발하는 주인공의 양심적인 행위를 중심 서사로 하는 영화 <워터프론트>(1954)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예술적 선택을 정당화했다.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은 단지 미국의 역사로만 읽히지 않는다. 분단과 내전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도 마녀사냥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래전에 읽었던 복거일의 소설 <높은 땅 낮은 이야기>(1988)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컨대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은 우리와 동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이미 끝난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우리 땅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세일럼의 마녀들>이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이라는 실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면, 이택광의 <마녀 프레임>(2013)은 마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추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 계몽주의의 도래로 마녀가 없어진 게 아니라 숨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마녀는 때가 되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녀는 사라진다. 엄밀히 말하면 마녀는 스스로 등장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우리에 의해 소환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나 마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마녀인 동시에 마녀 심판자이기도 하다. 마녀로 지목당하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마녀를 지목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핵심을 꿰뚫고 있다. 그렇기에 짧으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윤정용 본교 초빙교수·글로벌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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