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이 참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도전하지 않으니 실패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으니 좌절하지 않는다. 고통이 있어야만 성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나는 고난과 역경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고 도전하지 않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곤 했다.

 그것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흰 나비와는 달리 나는 바다가 무섭다.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 아니다. 주변에서, 뉴스에서, 인터넷에서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바다는 위험하다. 그러니 굳이 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바다의 위험성을 몰랐던 나비만 참 안됐을 뿐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행복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우물 안에서 성장한 개구리는 흰 나비의 이야기를 듣고 무슨 반응을 보일까? “괜히 무모한 짓을 해 고생한다,”고 혀를 끌끌 차지 않을까. 하지만 내심 바다를 궁금해 할 것이다. 훗날 죽음을 앞두고 사력을 다해 우물 밖을 나가려 할지도 모른다. “바다에 가보고 싶다고 울부짖으며. 이것이 나의 미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실 나는 흰 나비의 삶이 부러웠다. 이제 나비의 세상은 푸른 하늘과 꽃밭만이 전부가 아니다. 나비가 바다에서 물결의 위력만을 느끼고 돌아왔을까. 나비는 파도의 아름다움을, 바닷물의 시원함을, 처음 보는 생명을, 그리고 표면에 비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니 젖은 날개를 오들오들 떨면서도 이내 다시 바다에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다. 나는 도전을 하고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두렵다면 서글픈 얼굴을 하고도 다시 바다로 향하는 나비를 떠올리자. 행여 푹 젖은 날개로 비틀비틀 거리더라도 그는 저 망망대해로 나아갈 것이다.

 

양희재(미디어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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