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1 15:10 (목)
평범한 사람들이 남기는 소소한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이 남기는 소소한 이야기
  • 이선우 기자
  • 승인 2019.11.03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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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마을기록의 현재와 미래
지난달 19일, 주민들이 정릉2동 교통광장에서 열린 '2019 정릉버들잎축제'에서 사진전시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달 19일, 주민들이 정릉2동 교통광장에서 열린 '2019 정릉버들잎축제'에서 사진전시를 바라보고 있다.

  한 손엔 카메라, 다른 손엔 노트 한 권.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마을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는 이들이 있다. 서울시 곳곳에서는 민간 아카이브의 한 흐름으로 마을의 장소에 담긴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마을기록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토박이들이 많은 동네 정릉(貞陵)에서도 많은 주민이 마을기록가가 돼 기록 활동에 나서고 있다.

주민이 만들어낸 마을기록

  민간 아카이브로서 마을기록은 공공기록에서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마을의 역사, 장소, 일상을 기록하는 활동이다.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쉬운 마을의 구석구석에 대해 마을 주민들 스스로 소중한 기억을 지키자는 게 마을기록의 목적이다.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초기 단계지만, 그중에서도 정릉 마을기록은 역사가 길다. 2012년 마을잡지인 우리동네 능말을 시작으로 정릉 각지에서 주민 중심의 마을기록들이 활발히 생산되고 있다.

  지역의 유서 깊은 역사와 이곳을 살아간 사람들의 두터운 발자취는, 정릉 마을기록을 활발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정릉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정릉(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을 비롯해 박경리, 이중섭 등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또한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많아 30년은 살아야 오래 산 축에 낄 정도로 토박이들이 많다. 이들의 두꺼운 삶의 지층만큼 정릉에는 마을 주민들의 추억이 곳곳에 남아있는 셈이다.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주민차지가 활발하던 지역의 특성도 지금까지 마을기록이 끊기지 않고 유지된 이유다. 가령 2017년 그동안 수집한 마을기록을 총망라해 펴낸 <정릉 마을 한 바퀴>는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정릉2동 마을계획단의 노력으로 완성됐다. 당시 마을 계획단 단장이었던 김희자(·64) 씨는 반년 넘게 회의를 수십 차례 진행하며 힘들었지만, 마을의 기록을 하나로 모았다는 보람이 더 크게 남는다고 전했다.

  마을에 대한 애정을 마을기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간 주민들은 정릉 버들잎 축제와 같은 지역축제에서도 틈틈이 기록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손동유 아카이빙네트워크연구원장은 마을기록이 유지되기 위해선 주민의 활발한 참여가 필수적인데, 정릉은 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네방네 돌며 쌓아올린 그들의 일상

  정릉의 마을기록은 일상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령 떡을 먹다가 왜 정릉에는 떡집이 많을까라는 궁금증이 들면 정릉에 10개가 넘는 떡집들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물어보는 식이다. ‘절이 많아서라는 답을 찾게 되면, 정릉엔 또 하나의 역사가 덧씌워진다. 이처럼 평범한 삶 주변에 숨겨진 것들을 발견하고자 열심히 발품 팔아 뛰어다니는 것에서 기록은 시작된다.

  이들이 찾고자 하는 답은,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쥐고 있다. 2013년 정릉마을기록사업단에서 버스종점 전시회를 진행할 때, 당시 1번 버스종점에 대한 사진, 구술기록, 영상 등이 부족해 전시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정릉 주민으로 남아있었던 당시 버스 운전기사의 생생한 증언으로 전시회는 활기를 띨 수 있었다. 정말기록당 최연희 상임활동가는 정릉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기록할 수 있어도, 정릉의 가장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낼 사람은 동네 주민들뿐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카이브에 대한 경험이 없는 주민들은 처음 기록 활동에 뛰어들 때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구술채록의 과정부터 아카이빙이 무엇인지 학문적인 궁금증도 든다. 이에 마을계획단에선 2018년 정릉마을대학사업의 교육프로그램으로 전문가를 초빙해 마을기록 관련 교육을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당시 교육자로 참여했던 손동유 원장은 최소한 시행착오를 줄여보자는 차원에서 기록 대상, 기록 방법론과 같은 기록 활동의 기본 뼈대와 방법들을 공유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지역 주민들은 정말넷(정릉마을네트워크)’, ‘정말기록당(정릉마을기록 주민이야기마당)’과 같은 지역주민 네트워크를 통해 기록경험과 앞으로의 방향성 등을 공유하고 있다. 손동유 원장은 주민들이 서로 경험을 나눠 발전해가는 모습도 중요하고, 더불어 관에서 주민 활동 과정을 지원해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체계적 관리 시스템 갖춰야

  주민들의 열정과는 별개로 정릉 마을기록에는 주민들끼리 해결할 수 없는 과제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아카이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록을 보관할 공간이 없는 것이다. 구립 도서관이나 복지기관에서 모임이나 전시 공간이 필요할 때는 지원이 이뤄지지만, 기록 자체를 보관할 공간을 바로 마련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현재 기록을 하나로 연결할 체계가 없어, 주민들은 기록물을 각자의 자택에 보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연희 상임활동가는 마을기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어져야 의미가 커진다마을의 기록들을 계속 쌓을 공간과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성북구청에서도 마을기록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는 성북구 마을기록아카이브 사업을 작년부터 성북문화원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 참여 기록물의 관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이 만들어내는 많은 수의 기록물에 비해 인력이 부족하고, 저작권 문제로 개인이나 기관과 협의가 필요한 기록물도 있기 때문이다. 성북구청 측은 다양한 주체가 쏟아내는 자료를 규칙적으로 수집하는 체계는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에 여러 주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하는 기록물을 모을 체계적인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손동유 원장은 정부 기관에서 주민들이 기록을 저장하고 보관할 아카이브를 효과적인 틀로 지원해줘야한다고 말했다.

  답답한 상황이지만, 정릉 주민들에게 기록은 이미 일상이 됐다. 아리랑 시장 상인들의 이야기, 손님이 점점 줄고 있는 정릉의 이발소 등 주민들의 발 닿는 모든 곳이 기록의 대상이다. 정릉에 30년 넘게 살아온 이윤임(·61) 씨는 남들이 찾지 못한 정릉의 숨겨진 역사를 발견할 때 보람 을 느낀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라는 윤비의 상궁이 살았다는 터가 있는데, 지금도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을 한 명씩 찾고 있어요. 그 과정이 힘들지만 재밌죠.”

  주민들은 마을의 소소한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나 주민 간의 갈등같이 쉽게 터놓을 수 없는 문제들도 기록을 통해 풀어보려는 계획을 가지 고 있다. 최연희 상임활동가는 과거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치열한 오늘의 삶을 담는 것도 중요하기에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걱정, 고민을 기록화하고 진지하게 논의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마을기록에 젊은 피가 필요하다고 정릉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기록가로 오랫동안 활동한 주민들 모두 정릉에 대해선 베테랑이지만, 인터뷰 기획이나 타이핑같이 청년들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은 늘 어렵다. 청년들이 가진 기동력과 창의력은 더 나은 마을기록을 위해 필요하다. 최연희 상임활동가는 고려대와 같은 인접 학교의 학생들이 마을기록 활동에 동참해 주민들과 학생들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계기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 이선우기자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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