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한빛PD 3주기 추모제 '다시는'이 열렸다.
지난달 25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한빛PD 3주기 추모제 '다시는'이 열렸다.

 집합시간 오전 여섯 시. 이외에 정해진 건 없다. 오늘의 퇴근시간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올해 드라마 촬영 스태프로 일했던 김세연(·27) 씨는 자기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냥 밤새 찍는 거예요. 오늘 무슨 씬을 찍어야 하는지는 대략이나마 알 수 있는데, 얼마나 촬영을 할지, 언제 퇴근할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드라마 촬영현장에 드디어 표준근로계약서가 도입될 예정이다.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은 지상파방송 드라마 제작환경개선 공동협의체에서 표준근로계약서에 들어갈 표준근로시간, 인건비 기준 등 핵심내용을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표준근로계약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스태프들은 계약 내용을 떠나 인간적인 대우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방송 스태프, 노동자인가

 방송 스태프의 근로자성은 해묵은 주제다. 스태프들은 근로자성을 인정받고 근로계약을 맺음으로써 규칙적인 근로시간, 휴일, 초과수당 등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 예능, 교양 스태프 총 408명의 응답 데이터를 분석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8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이하 2018 실태조사)’에 따르면 드라마 스태프 중에서 근로계약경험이 있다고 대답한 비율은 18.3%에 불과했다.

 올해 7월 고용노동부는 KBS 4개 드라마(<왼손잡이 아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닥터 프리즈너>, <국민 여러분>) 현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로감독결과에서 팀원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했지만, 팀장급 스태프들은 독립사업자로 분류하며 근로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홍승범 사무차장은 이로 인해 드라마 제작사는 여전히 각 스태프에 대한 사용자 책임을 각 팀장에게 전가할 수 있다하지만 팀장급 스태프들도 결국 제작사에서 관리하는 촬영 일정에 따라 이동하고 업무를 수행하므로 당연히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위계뿐 아니라 업무에 따라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달리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산업정책팀 오하영 연구원은 지시를 받고 근무 장소가 특정되는 스태프가 있는 반면,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스태프도 있다모든 스태프를 획일적으로 근로자 혹은 프리랜서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근로계약과 더불어 충분한 인력 투입돼야

 그동안 스태프 계약은 구두계약 또는 주먹구구식의 서면계약이 대부분이었다. 구두계약은 2018년 들어서면서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게 발생한다. 2018 실태조사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드라마 기술 스태프 중 약 59%의 인력이 구두계약을 경험했다고 대답했다.

 작가나 연출 스태프의 경우 제작사와 스태프 간 개별 계약이 대부분이지만, 기술 스태프 사이에서는 팀 단위로 계약하는 이른바 턴키계약 관행이 여전히 잦다. 해인예술법연구소 박정인 소장은 턴키 계약은 실제로 일하는 이가 시키는 사람에게 종속돼 있지만, 겉으로는 평등해 보인다게다가 근로계약이 아니니 여러 가지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4년에 방송 프로그램 제작스태프 근로표준계약서4가지 표준계약형태를 제시했지만, ‘권고수준의 계약서는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해내진 못했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인력 자체가 부족한 상황에서 표준근로계약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순 없다. 2018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스태프 중 43.4%충분한 제작인력 투입을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1순위 과제로 꼽았다.

 충분한 인력 투입이 어렵다면 사전제작과 편성시간 축소가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사들은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피며 내용을 수정하길 선호해 사전제작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홍승범 사무차장은 주당 방영일이 미국이나 일본은 1일인데 반해 한국은 대다수가 2일 방영 체제라며 당연히 촬영시간이 2배 이상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에 비해 인력은 늘리지 않으니 장시간 근로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사간 합의를 통해 편성시간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살신성인 NO, 스태프가 바라는 건 존중

 ‘방송스태프가 노동자냐, 아니냐만큼 중요한 게 현장의 분위기다. 촬영 스태프로 일했던 김세연 씨는 올해 3월에도 하루에 14시간 동안 촬영한 적이 있다.”촬영 팀은 촬영만 준비하면 되지만, 촬영보다 먼저 출근해서 준비할 때도 많은 다른 팀들은 해당 업무에 대해 돈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인맥으로 알음알음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방송업계의 폐쇄적 환경이 스태프들의 목소리를 제한하기도 한다. 따라서 낮은 지위에 있는 방송 스태프가 그저 불공정을 참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도록, 방송 스태프의 교섭력이 외주제작자와 대등해지도록 관심이 필요하다.

 홍승범 사무차장은 현재 드라마 현장의 분위기는 한 개 드라마가 끝나면 감독이 팀원들을 다시 다음 작품에 데려가는 형태라며 이는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요구사항이 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섣불리 제기하지 못 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계약내용도 중요하지만, 스태프들을 존중하고 같이 일을 해나가는 동료로 여기는 인식이 필요하다. 박정인 소장은 법원이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현장의 분위기가 중요하다해가 지고 나서 업무를 해야 할 때는 미리 합의를 통해 일정 시간을 넘기지 않는 등 서로를 배려하며 체결하는 프로젝트계약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스태프에게 살신성인 수준의 노동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변화돼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박성수 기자 park@

사진제공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제작사나 방송사가 스태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봤을 때는 우리는 그저 부품, 소모품인 것 같아요. 콘텐츠를 잘 만들어서 수익을 발생시켜야겠다는 생각보다, 주어진 제작비를 절감해서 수익을 만들어내는 구조예요. 그 과정에서 스태프가 너무 힘들다는 걸 생각 못 하는 것 같아요.”

(기술 스태프/드라마/촬영/15년차) - 2018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

스태프 입장에서 자기가 근로계약서를 써야 하는지, 프리랜서 계약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문체부에서 내놓은 여러 가지 계약서가 있어도, 제작사는 당연히 자신들한테 유리한 계약서만 채택해서 쓰는 것 같고요.”

(기술 스태프/드라마/조명/20년차) - 2018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

표준계약서 활용이 관행이 돼도 계약을 지키지 않거나 계약사항을 수정해 장시간노동을 이어갈 수 있어, 계약의 도입만이 유효한 대책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 세계 유례없는 주 2회 드라마 편성과 사실상생방송으로 촬영하는 관행이 해결돼야 합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김동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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