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역사관 안으로 입장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역사관 안으로 입장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하차해 5번 출구로 나오면, 붉은 벽돌로 이뤄진 높은 담장이 관람객들을 압도하듯 맞이한다. 최근 불거진 한일관계 악화가 역사교육의 갈증을 부추긴 것일까.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오전 시간대는 견학 온 초중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외에도 단체로 형무소를 찾은 공무원과 군인들, 또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도 눈에 띄었다. 연령대별로 다양한 사람들이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기에, 그들이 이 공간을 대하는 방식도 다채롭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해설을 통해 한층 의미 있는 관광을 돕고 있는 황용천(·50)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서대문형무소를 둘러보는 관람객들을 살펴봤다.

 

전시실로 조성된 형무소 내부에서 학생들이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전시실로 조성된 형무소 내부에서 학생들이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다.

깊은 공감으로 이어지는 어린이의 미숙함

 관람에 본격적으로 임하기 전 견학 온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질서를 지키면서 봐야 해요.” “여기서부터는 조용해야 해.” 넓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듯 뛰어다니는 학생들과 소리 내며 웃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도슨트들은 이들을 통제하고 진정시키는 데 다소 힘을 뺐다. 단체로 견학 온 어린이들은 단순히 교실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들뜨고 행복해 보인다.

 옥사에 들어가면 수감자들이 겪었을 고통의 현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도 어린 학생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학습을 위한 정숙한 마음가짐이라기보다는, 간만에 친구들과 야외로 놀러 왔다는 기쁨과 해방감이 더 우세한 듯했다. 수감됐던 독립운동가들의 아픔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독방에서도 몇몇 학생들은 서로에게 죄수 번호를 붙이며 장난치거나, 간수를 호출했던 용도로 사용된 막대기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사뭇 진지하게 옥사를 살피는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공부하고 난 후 이곳에 오니까, 수감된 분들이 정말 대단하고 멋지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화가 나요. 지금 그냥 뛰어노는 제 친구들도 이런 슬픈 역사에 파고들어서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서호성(·13)

‘ 진정성이 없다고 꾸짖을 법한 모습이지만, 황용천 도슨트는 설명에 집중하게 하는 긍정적 요소로써 학생들의 미숙함을 강조했다. “어른들하고 어린 학생 중에 누가 더 설명을 잘 들을 것 같아요? 당시 감옥 생활을 얘기해주면 충격적이잖아요. 오히려 어린 친구들이 눈을 반짝이며 들어요. 예전에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제 얘기가 너무 무섭다고 울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어린 친구들을 위해서 참혹했던 현실의 모습도 가능하면 순화해서 전달하고 있어요.”

 

알지만, 새롭게 느끼는 현장

 황용천 도슨트와 함께한 영주시 공무원들은 어른답게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으로 관람을 이어나갔다. 비좁은 방에 성인 남자 3~40여 명이 잠을 번갈아 청해야 했다거나, 수감자들의 손톱 밑을 찌르는 등의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혀를 끌끌 차거나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후 도슨트와 관람객들은 추모비에서 다 같이 묵념하며 희생됐던 분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장에 끌려가며 부둥켜안고 원통함을 토해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가 보이는 사형장으로 향했다. 일반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면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계했지만, 고문으로 심하게 몸이 훼손됐거나 영향력이 큰 독립운동가의 경우 시신을 숨긴 탓에 죽어서도 가족 품에 돌아가지 못한 분들이 많다는 역사를 황용천 도슨트가 설명했다. 새로이 듣는 이야기에 관람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따금 관람객들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처음에 형무소 올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왔어요. 도착해서 옥사나 사형장같이 비참한 장소를 보니까 갑자기 마음이 착잡하더라고요. 수감된 독립운동가분들의 희생이 마음 깊이 느껴지고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되새겨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박세영(·36)

순국선열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앞에서 관람객들이 묵념하고 있다.
순국선열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앞에서 관람객들이 묵념하고 있다.

 도슨트는 관람객이 어릴수록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던 이들의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어른들일수록 역사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가 낯선 아이들은 이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슬픔을 느끼기만 해도 제 몫을 다한 거지만, 역사의식이 이미 있는 어른들에겐 좀 더 장소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이 와 닿도록 다소 생소한 역사 이야기를 위주로 전달해요.”

 역사에 관해 공부할수록, 또 바라보는 관점이 확장될수록 서대문형무소를 관람할 때 얻어가는 경험과 지식의 폭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황용천 도슨트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갈 때마다 주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점차 성숙해지면서 역사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잖아요. 어릴 땐 단순히 독립운동가들에게 고통을 준 일본이 나쁘다고만 느껴지는데, 커서는 독립운동가,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상처 입은 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게 되고, 아픈 역사 속에서 교훈 또한 찾게 되잖아요. 당대의 아픈 역사와 더불어, 우리의 독립정신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가치까지 점차 인식하게 됩니다.”

 

교육의 장이자 공감의 장

 관람이 끝나자 단체 견학을 온 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러 떠나 서대문형무소가 한층 한적해졌다. 조용해진 전시관에는 개인적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눈에 띄었다.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온 이은정(·39) 씨는 아이들에게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울산에서 이곳까지 왔다. “단순히 학습의 목적으로 왔는데, 직접 이렇게 현장을 마주하니까 아들이 말한 것처럼 무섭고 놀랍기까지 해요. 저도 감회가 새롭고 느끼는 게 많아서 아이들이 크면 또 서울에 와서 이곳을 방문할 생각이에요.”

 노인들도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독립운동가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들에겐 일제강점기가 더욱더 가깝게 느껴진다. 친구들과 처음 이곳을 방문한 윤금숙(·80) 여사는 인터뷰 도중 눈물이 터져 나왔다. 윤 여사에게 일제강점기는 역사라기 보단 기억이었다. “독방이 너무 끔찍해. 이곳을 지금까지 안 와봤다는 게 너무 부끄러워. 그렇게 핍박받은 당시 어른들이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지네···. 기자 양반처럼 젊은이들이 이렇게 치욕적인 역사가 다시 안 일어나게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줘.”

한국인으로서 서대문형무소를 한 번도 안 와봤다는 게 너무 부끄럽더라고···, 내가 5살 때 해방이 됐는데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리니까 더 울컥하는 거야. 울분이 너무 치밀어 올라서 잠깐 벤치에서 쉬다 가야겠어···.” -윤금숙(·80)

 이렇듯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많은 이들은 이곳을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놀이터, 누군가에겐 배움의 장소, 누군가에겐 기억의 장소가 된다. 이들이 점차 나이를 먹어가고, 생각과 지식의 폭 또한 변화하면서 이 장소는 또다시 다른 모습으로 아로새겨질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맞이해 도시개발의 일환으로 철거 위기를 맞은 서대문형무소는 서대문구청과 독립운동가 후손 및 역사학자, 시민운동가들이 역사교훈의 장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서대문형무소를 지키고자 한 이들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고, 의미 있게 이곳을 눈에 담는 방법은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각자의 시선에 맞게 꾸준히 이곳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김태형 기자 flash@

사진전남혁 기자 m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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