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를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사회라고 한다. 오프라인 온라인을 막론하고 수많은 매체를 통해, 다양한 자료와 정보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 빅 데이터,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 시대를 상징하는 개념들이 우리 주변을 휘감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지성인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다. 자료와 정보를 먼저 제시하는 존재가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처럼 느껴진다. 그에게 나이나 성별, 도덕이나 학력 등을 캐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특히, 대학 졸업이라는 학력(學歷)의 문제는 크게 논의되지 않는다. 대신,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는 학력(學力)이 중요하다는 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은 의미가 없는가? 대학이 사회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학문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때, 사회적 신뢰는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다시 돌아본다. 이 시대에 대학이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일까? 대학은 시대정신을 반영한 지식을 담보하는가? 지성을 함양하는가? 단호하게 답변하거나 쉽게 정돈할 수 있는 사안은 결코 아니다. 진지하고 신중한 정의가 필요하다. 그 성찰적 사고를 동양 지식인의 백미로 꼽히는 사마천(司馬遷)의 삶에서 찾아본다. 물론, 사마천과 우리 시대는 그 거리가 아주 멀다. 그러나 인간의 보편적 삶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그들의 인생을 현실에서 충분히 다시 당겨 되새김질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사마천은 사형에 직면했다. 살아남기 위해 궁형(宮刑)을 선택했다. 극형을 당하면서도 분노하는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다. 담담했다. 이유가 있었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한 지식인의 책무 때문이었다. 그와중에 사마천은 친구 임안(任安)에게 쓴 편지에서 피눈물 나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것은 지식인으로서 지성을 고양하려는 처절한 투쟁이었다.

  “내 몸을 수양하는 일은 지혜의 창고를 만드는 작업이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것은 사랑의 실마리를 확보하는 일이다.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행위는 의리가 드러나는 상황이다. 수치와 모욕을 당했을 때는 용기로 결단할 것을 요청한다. 명예를 세우는 일은 실천의 궁극적 목적이다(修身者, 智之府也. 愛施者, 仁之端也. 取予者, 義之符也. 恥辱者, 勇之決也. 立名者, 行之極也.)”

  사마천은 인생 최악의 상황에서 고차원적 사고를 누적했다. 지식인은 수양-베풀기-주고받기-수치와 모욕-명예를 사이에 두고, ‘지혜-사랑-의리-용기-실천이라는 다섯 가지 삶의 태도를 갖추어야 지성인으로 우뚝 설 수 있다! 그는 궁형이라는 인생 최대의 치욕을 겪으면서도 지식인으로서 책무성을 서슴없이 요청했다. 왜 그랬을까? 지성인으로서 사명을 다하려는 철저한 자부심이나 긍지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마천의 다짐은 다음과 같은 언표로 동서고금의 지성 사회에 회자된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라!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라! 일가의 학설을 이루라!(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30여년 전 대학시절, 나는 스승으로부터 이 구절을 배우면서 전율을 느꼈다. “사마천의 학문 태도를 보라! 대학생들은 정말 지성인답게 공부해야 한다! 배운 만큼 달라야 한다!” 당시, 스승의 부탁은 간절했다. 아직도 그 말씀이 내 가슴에 또렷이 남아 있다. 우주 자연과 인간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변화에 통달하라! 나아가 자신의 영역에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성과를 기약하라!

  ‘누구나, 언제 어디에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라는 이 시대의 표상을 보면서, 다시 진지하게 돌아보며 묻는다. ‘한국의 대학은, 이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인이나 지성인을 배출하고 있는 가?’ 사마천의 관심처럼, 심오하고 정밀한 탐구에서 일가를 이루기보다 천박하고 거친 활용이 많지는 않은가! 나는 희구한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나의 제자들과 대학인들이, 깊은 탐구를 통해 시대변화를 읽고 시대정신을 구가할 수 있는 지성인으로 성숙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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