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복원사업으로 가야사를 체계적으로 규명할 기회는 열렸지만, 그동안 가야사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던 연구자들의 고민은 여전하다. 삼국에 비해 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사료도 현저히 부족한 탓에 일정한 한계에 부딪혀왔다. 학계 간 교류의 부족과 연구인력 양성의 문제는 가야사 규명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삼국에 소외되고 사료도 부족해

 가야사 연구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에 비해 뒤처진 것은 문헌, 유물 등의 사료(史料)가 부족해서다. 가야는 삼국과 달리 중앙집권화된 정치체를 이루지 못하고 멸망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역사서가 있는 삼국과 달리, 가야는 단편적인 기록만 존재할 뿐, 성립부터 멸망까지의 전 과정을 서술한 사서도 없다. 박대재(문과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가야의 역사가 삼국의 관계 속에서만 일부 서술되는 등, 삼국 중심의 역사 서술로 인해 가야가 우리 고대사에서 배제된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삼국지(三國志)와 같은 국외 역사서에도 가야에 대한 서술이 일부 등장하지만, 타국의 시선에서 바라봤기에 편향됐거나 빈약하다는 한계가 있다. 일본서기의 경우 가야사를 비교적 많이 서술했으나 고대 일본이 임나(가야) 지역에 통치기구를 두고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됐다. 일제강점기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활용됐기에 해방 이후 가야사 연구에서 일본서기의 활용은 한계를 지녔다. 이동희(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는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설 등 왜곡된 기사가 적지 않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들어서 천관우 등의 연구자가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로 문헌 활용을 높이긴 했지만, 가야사를 다룬 문헌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에 모든 학자가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문헌사료 대신 고고학을 중심으로 유물, 유적을 연구해 가야사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남재우(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발굴된 유물, 유적의 편년과 양식 차이를 분석하는 과정 등을 통해 문헌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가야사 규명에 고고자료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국사에 비해 가야사가 주목받지 못한 상황에서 가야사 관련 유물·유적 발굴도 활발하진 못했다. 주로 토목건설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돼 발굴이 진행된 게 대부분이고, 학술조사를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발굴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가야의 유물, 유적들이 체계적으로 보호되지 못했고, 고분의 경우 무관심 속에서 파손, 도굴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영식(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는 삼국사에 비해 가야사가 축적될 만한 제도적 환경, 발굴 기회가 갖춰지지 않다 보니 가야사가 원래 가진 모습보다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교류되지 않는 의견 공동 연구 필요해

 지지부진했던 발굴조사와 정비는 현 정부가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하며 활력을 얻고 있지만 이를 종합해 가야사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학계 간의 교류는 부족한 상황이다. 특히 발굴을 주도하는 고고학계와 그동안 가야사를 정립했던 문헌사학계 간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야사의 시간적 범위를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고고학계와 문헌사학계는 의견을 달리한다. 가야의 멸망 시점을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으로 보는 것엔 대체로 이견이 없지만, 가야의 시작을 두고 전사론(前史論)과 전기론(前期論)으로 대립하고 있다.

 고고학계에선 변한과 가야를 구분지어 바라보는 전사론이 우세하다. 예를 들어 김해 가락국 왕들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대성동고분군 내 명확한 차이를 가지는 고분에 주목해 목곽묘를 두 시기로 나누며, 2기의 목곽묘와 1기 사이 파괴의 흔적이나 부장품의 차이를 근거로 3세기 말~4세기 초에 지배층의 교체와 같은 변동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문헌사학계에선 그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변한을 가야의 역사와 구분 짓는 건 가야의 내재적 발전 과정을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이라며 전기론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위서 동이 한전(魏書 東夷 韓傳)에는 변진(변한)12국이 있다고 서술돼 있다. 시간이 흘러 가야가 멸망한 이후인 8세기 초반 편찬된 일본서기에서는 임나(가야)10개의 국이 있었다고 적혀있고, ‘일본서기내 다른 기록에 두 개의 국을 추가로 전하고 있다. , 두 기록은 삼국지에 기록된 변진 12국이 일본서기에 서술된 가야가 멸망된 시점까지 장기간 존속했다는 걸 보여준다. 변한과 가야가 다른 나라가 아닌, 한 시대의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고고학과 문헌사학, 한 가지의 논리만으로 가야사의 시작을 정할 수 없기에 학계 간 연구 성과 교류와 공동 연구가 진행돼야 하지만, 상호 학문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이마저도 어렵다. 고고학자인 이동희 교수는 지금까지 문헌사학자와 고고학자는 각자의 주장만 가지고 상대의 입장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이는 가야사를 기형적으로 만든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고령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다. 5~6세기 대가야의 관모공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고령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다. 5~6세기 대가야의 관모공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가야사 복원 이끌 젊은 연구자 육성해야

 학계의 이견은 지속적인 토론 과정을 거쳐 더욱 발전된 통설로 나아갈 수 있지만, 현재 가야사 연구 기반에선 건설적인 토론이 어려운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가야사를 독립적으로 다룬 학회가 없으며, 새로운 설을 꺼내 들 신진 연구자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영식 교수는 현재 가야사에선 견해 차이가 11로 대응될 뿐 다양한 학설이 나오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지자체보단 학계 중심으로가야사 연구 개척하고정부차원에서 연구의 비전을제시하며 연구자 이탈 막아야젊은 연구인력 양성도 필요해

 가야사만을 다룬 학회가 없는 탓에 한국고대사학회는 가야사 연구의 현황과 전망’, ‘문헌과 고고자료로 본 가야사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개최해 의견 교류의 장을 마련했다. 하지만 학술대회가 기업의 후원으로 진행된 탓에 장기간 지속할지도 확실치 않다.

 현재 가야사 복원사업을 담당하는 지자체에서도 학술대회가 비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지만, 지자체보단 학계가 중심이 돼 가야사 연구를 개척해야 한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지자체 위주로 연구와 복원이 진행되다 보면 지역 안팎의 연구자 사이의 소통이 어렵고, 해당 지자체의 지역사 부풀리기에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주보돈(경북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연구자들은 지자체가 지역 내 가야의 역사를 과대해석하려는 움직임에 동원돼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가야사 연구자의 고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가야사 연구의 지속을 위해선 젊은 연구자의 양성이 절실하다. 사료가 부족하고 연구가 대부분 지방에 국한된 탓에 가야사를 연구하려는 신진 학자들의 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최근 가야사 복원사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영남지역에선 가야사와 가야고고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인원이 증가하는 추세지만, 이들 연구자의 이탈을 막기 위해선 정부 차원에서 가야사 연구의 비전을 제시해줘야 한다. 박대재 교수는 정권별로 달라지는 지원 사업은 시간적 한계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인문학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 에 연구자를 지원하고, 새로운 연구자를 양성해야 가야사 연구가 지속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 | 이선우 기자 echo@

사진 | 양가위 기자 fl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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