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학의 역사는 미메시스(mimesis)의 원리를 극대화하는 리얼리즘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실제 세계를 모방하고 반영하려는 기획을 추구한 리얼리즘 미학은, 역사의 흐름 자체를 무화시키면서 펼쳐진 상상, 공상, 환상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타자화하고 주변화하였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리얼리티를 새롭게 해석하고 접근하려는 태도가 대두하면서 독서 시장에는 이른바 판타지 열풍이 불어 닥쳤다. 그동안 공상정도로 치부되었던 미학적 경향이 새로운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표현 방법으로 들어온 것이다. 톨킨(1892~1973)의 사례를 한번 생각해보자.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신화학자였으며, 매우 드물게 고고학적 식견과 현대적 감각을 아울러 견지한 탁월한 인물이었다. 물론 북유럽의 문화적 향취를 한껏 담은 그의 문학 세계가 처음부터 대중의 공감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그의 언어와 방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으며, 광적 매니아로 변해가는 이들도 늘어났다. 2001년 제작된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는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고, <반지의 제왕> 활자와 영상 텍스트는 예술사의 큰 대중화 흐름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톨킨 작품을 통해 경험한 것은 신화나 환상적 요소 외에도, 치밀한 플롯과 유려한 문체로 상징되는 허구적 구성 능력이었다. 그는 실제로 가장 완벽에 가까운 현대 영어를 구사하였고 언어 자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고대 영어와 유럽어() 요소들을 결합시키기도 하였다. 작품 속 마법 공간은 세계의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리얼리티를 제공했는데, 그 공간은 모든 영웅 신화와 모험 서사를 공존케 한 혼성모방(pastiche)을 구현하였다. 또한 그가 사용한 어휘들은 라틴어 요소를 거의 포함하지 않고 켈트와 게일 어 및 웨일즈 방언을 위시한 북구 언어들을 적극 채용하였다. 이는 환상문학이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서 길어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풍속과 언어와 신화에 대한 섭렵을 통해 가능한 것임을 알려준다. 이처럼 환상은 실제 세계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프랑스 비평가 이자벨 스마쟈는 톨킨 소설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바 있는데, 그녀는 이 작품이 인간의 선한 의지와 희생정신 그리고 권력 욕망과 자기 발견의 과정 등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이러한 외연과는 달리 선악 구분이 모호한 상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톨킨에게 열광한 이유를, 선악 구분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욕망을 대리 충족할 수 있게끔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북유럽의 많은 신화와 전설과 민담을 토대로 새롭게 창조한 <반지의 제왕>이 출간된 1950년대를 생각하면, 우리는 세계 지배를 위해 살상무기로 무장한 채 발호하던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우화로 이 작품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환상문학의 대가 마르케스와 보르헤스 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국내에서도 환상문학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매우 활발히 이루어진 바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리얼리티가 환상의 미학적 수용과 착근에서 가능해졌다는 역사적 맥락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우리는 달라져가는 미학의 방식을 통해 새롭게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라보고 해석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큰 간극을 가지면서 달라져가고 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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