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근 교수는 "기념에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치우쳐진 기억의 개념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호근 교수는 "기념에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치우쳐진 기억의 개념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호근(문과대 사학과) 교수는 최루탄이 어지러이 떨어지던 1987년 서울의 하늘을 기억한다. 30년도 더 지났지만, 어제 일 같다. 매캐한 최루가스에 쏟은 눈물, 콧물, 정신없는 와중에 뒤엉키는 동기들, 매섭게 휘둘리는 경찰의 진압봉. 잊고 싶지만,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 강연을 준비하다 (이한열 열사) 영결식 장면을 다시 봤는데, 또 눈물이 나더군요.”

 한때 사실로 인정되지도 못했던 그 시절 기억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다. 매년 6월이 되면 그 시절을 장소로, 행사로, 노래로 추억한다. 이른바 기념하는 사회. 제주 4.3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과거 국가권력이 은폐한 기억을 엄숙히 기념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기념에서 어떻게는 고려되지 않았다. 그의 저서 <기념의 미래>에서 최호근 교수는 지금의 기념방식이 사건을 직접 겪었던 체험 세대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눈물로 벌게진 눈가를 매만지며 시대의 기억을 붙잡는 그에게, 기념문화에 대한 진단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물었다.

 

- 개인이나 집단이 기억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억한다는 건 되게 예외적인 일이에요. 개인은 가장 좋았던 순간이나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이례적으로 기억하고, 나머지는 망각하죠. 하지만 집단의 기억은 권력과 연결돼 있습니다. 집단 내 약자에겐 인정이 중요해요. 인정을 통해 차별받지 않고, 희생을 당했을 땐 배·보상을 통해 명예회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강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죠. 강자가 집권하는 현재가 최선인 것처럼 사람들을 교육하거나, 여러 매체를 통해 그 뜻을 전달하려 합니다. 강자는 약자의 기억을 억압하고, 약자는 반대로 기억을 지켜내려 하는 것이죠. 이것이 기억의 정치입니다.

 이 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각자의 기억을 사회 전체의 기억으로 만들어야 해요. 이때 약자는 강자에 맞서 기억을 확산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건, 죽음을 강조해요. 4.19혁명의 김주열, 6월 항쟁의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기억이 사회의 지지를 받게 될 때, 그 기억은 사회의 기억이 되고, 인정받게 되는 거죠.”

 

약자의 기억을 공인하고, 기념하는 움직임은 1990년대를 넘어서며 제도권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련의 붕괴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관계가 깊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독재가 사라지자 전 세계에 걸쳐 억눌렸던 국가폭력, 인권유린에 대한 저항이 분출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 집권 이후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구속 등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진행했다. 더이상 국가폭력과 같이 숨겨온 기억을 억압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확산됐다. 과거사위원회의 설치, 피해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국비로 진행되는 다양한 기념사업들이 시작된 것도 이때다. 도둑처럼 기념의 시대가 찾아왔고, 기억도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국립 5.18 민주묘지의 추모탑이다. 최호근 교수는 경쟁할 듯 높이 쌓은 탑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와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국립 5.18 민주묘지의 추모탑이다. 최호근 교수는 경쟁할 듯 높이 쌓은 탑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와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 도둑처럼 기념의 시대가 찾아왔기에, 그만큼 준비가 부족했을 수도 있겠네요

가령 은폐된 국가폭력 사건을 해결한다는 건 먼저 진실이 규명되고,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배·보상이 이뤄지는 걸 의미합니다. 기념은 그다음 문제죠. 하지만, 앞의 것들은 정부 입장에서 부담이 커요. 진실 규명하려니 걸리는 사람이 너무 많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지형도 아니고, ·보상은 돈이 너무 많이 들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국가 정책이 기념사업에 집중됐어요. 넓은 부지로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묘지를 크게 지어주는 방식으로 보상을 한 거죠. 또 묘지도 그 당시 모델이 국립묘지(현 국립 서울현충원)밖에 없으니까 중앙탑, 거대한 게이트, 봉분의 양식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어요. 근데,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었던 한국전쟁기 전사자나 경찰 같은 경우엔 그런 양식이 맞을지 몰라도,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잖아요. 국가의 획일적인 명령 질서를 따르지 않았다고 죽였는데, 그 방식을 준용하는 게 과연 맞을까요? 마치 소녀에게 국방색 군복을 염색해 줄여 입혀놓은 꼴이 된 거죠.

 피해자들의 저항성을 고려하지 않은 거예요. 5.18의 경우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한 12·12 쿠데타 이후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났어요. 다양한 사람이 통일되지 않은 방식으로 들고 일어선 흔적이 기념에도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죠. 통제가 쉬운 엄숙한 방식으로 의례를 진행하고, 유가족들은 꽃 달고 있다가 대통령 손을 잡으면 끝나는 거예요. 과거 5.18이 가지고 있는 저항성, 변화의 갈증이 의례에 전혀 남아있지 못하는 거죠.

 5.18을 상징하는 기념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도 전대 정부에서 여러 시련을 겪었어요. 곡의 제창 여부를 두고 갈등을 겪기도 했죠. 두려운 거예요. 잘 만든 노래는 곡 안에 힘이 있어요. 정서에 파고들어 자리를 잡고, 연대의 끈을 이어주며, 상황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에게도 그때의 감정을 전달해줘요. 또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앞으로 나가자는 메시지를 던져주죠. 이 부분이 기억의 정치가 우리의 대중문화와 딱 만나는 지점이에요.”

 

획일적인 기념은 결국 기념하고 기억하는 걸 피로하게 만들었다. 최호근 교수는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두기만 해도 젊은 세대들이 과거의 아픔을 똑같이 느낄 거라 믿는 586세대의 환상을 경계했다. 요즘의 학생들이 직접 겪은 세월호 참사의 기억은 생생히 느껴도 4.19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직접 겪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차이는 크기 때문이다.

 

- 비극을 겪지 못한 세대에게 과거 세대의 기억이 먼 일로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당연하죠. 일렬로 자리한 무덤, 초대형 기념물,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동상만 놓고 기념하라고 하면 무엇을 느끼겠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은 기념의 목표를 재현에 뒀어요. 특별한 모델도 없는 상황에서 극도의 리얼리즘으로 과거의 현장을 재현하면 될 거라 생각한 거죠. 고문 장면 재현하고, 쇼윈도로 유골 보여주고, 피 묻은 태극기 전시하는 게 그 예에요. 하지만 그렇게 리얼리즘을 강조하다 보면 혐오감과 거리감을 만들어요.

 물론 시신, 유골은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엔 분노를 결집하는 역할을 했어요. 동아시아 사회엔 죽은 사람의 몸에 대한 본능적인 경건함이 있어서, 죽은 아들을 보며 통곡하는 부모를 통해 제 부모를 생각하고, 부모 된 자는 본인의 자식을 떠올려요. 동시대 사람들에겐 절대 못 잊을 경험이죠. 하지만 그걸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겐 울림을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자극일 뿐이에요. 체험 세대와 비 체험 세대 사이에 공감의 방식이 다르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해요.”

 

진아영 할머니는 토벌대의 총에 맞아 아래턱을 못 쓰게 된 이후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옹색한 생가에는 무명천 할머니의 한 많은 삶이 그대로 남아있다.
진아영 할머니는 토벌대의 총에 맞아 아래턱을 못 쓰게 된 이후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옹색한 생가에는 무명천 할머니의 한 많은 삶이 그대로 남아있다.

- 그럼 비 체험 세대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념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비 체험 세대, 더 나아가 외국인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선 보편적 가치에 주목해야 해요. 국가폭력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인권이나 평화와 같은 개념이 중요하잖아요. 외국인들에겐 민족주의가 낯설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민족, 민중, 민주에 치우쳐진 기념의 개념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필요할 것 같아요. 주변의 이야기, 이웃의 이야기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게요.

 제주에서 4.3사건이 벌어졌던 당시, 아래턱에 총을 맞아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가리고 살았던 할머니가 계셔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7평 남짓한 할머니의 생가를 보존·전시하고 있는데 허름한 내부를 보면 마치 할머니가 죄지은 것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요. 녹슨 문고리, 싸구려 장판, 낮은 천장. 옹색한 건물이 그대로 할머니의 삶을 보여줘요. 수많은 분이 그 분위기를 느끼고 할머니의 삶에 딱 공감했죠.

 첫인상에서 내면의 동요를 줄 수 있다면 성공한 거예요. 한국의 기념방식을 뒤집기 위해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그중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방식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의 경우엔 건축에서부터 기념의 은유가 표현돼 있어요. 중간중간 구조적으로 공백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베를린에 지내다 하루아침에 소거됐잖아요. 그 빈자리를 표현했어요. 그리고 그 아래에 사람 얼굴을 모티프로 한 철판 작품을 깔아놨습니다. 철판을 밟으면 철퍽철퍽 되게 불편한 소리가 나요. 밟는 순간, 마치 나치가 된 느낌, 유대인 설치예술가들이 참 대단하죠. 은유적으로 감각의 동요를 일으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기억을 더 오래, 더 멀리 퍼지게 하는 것, 한때는 동지였던 이들에 대한 책임감이 빚어낸 목표다. 최호근 교수는 온라인’, 그리고 교육에 시선을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기념을 온라인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오프라인으로 전시물을 감상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라인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더 많은 사람이 한국의 기억과 기념에 주목할 수 있어요.” 특히 한국의 식민지, 국가폭력의 경험은 비서구 지역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경험이다. 사건과 관련한 장소, 연대기, 인물 등의 정보를 온라인 기반의 플랫폼에 올려놓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면 국적불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비 체험 세대의 공감을 끌어낼 전시와 교육을 결부시킬 것을 강조한다. “교육을 통해 비 체험 세대의 공감을 계속 끌어낼 수 있다면 분명 그들은 또 다른 역사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반응을 계속 얻어내려 한다면, 분명 기념은 과거의 영광이 아닌 미래의 진실한 교훈이 될 것이다. 최호근 교수가 강조하는 기념의 책임감이다.

 

글 | 이선우 기자 echo@

사진두경빈 기자 hayabusa@

사진제공 | 무명천 진아영할머니 삶터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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