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열광했다. 1994년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있을 리는 없었고, 오히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과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접하게 해줘서 좋았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아득하기만 했던 당시에 나에게는 각지에서 올라온 등장인물들이 서울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삶이 청춘의 상징처럼 각인됐다. 또 드라마에서 자주 그려진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애착이라는 감정은 나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경기도 과천에서 태어난 나는 6살 때 옆 동네인 안양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16년을 살아왔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도 서울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유독 야자를 하기 싫은 날이면 잠실에서 야구를 봤고 시험이 끝나면 으레 강남이나 명동으로 향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고 매일 서울로 통학을 한다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생각보다 별거 없고 싱거운 새 출발을 맞이했고 어른이라는 실감도 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새롭게 만난 친구 중에는 부산에서 온 친구도, 광주에서 온 친구도 있었다. 그들은 동향 사람을 만나면 몹시도 반가워했고, 자주 엄마 밥을 그리워했고, 새로운 삶에 때로는 설레하고 때로는 버거워하며 성장통을 겪는 듯도 했다. 힘들고 지칠 때면 기차표를 끊고 고향에 가서 엄마 밥을 먹고 푹 쉬고 온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는, 누구에게는 정말 큰 의미로 다가올 고향이 내게는 그저 남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단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고향의 안락함과 그 고향을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나가며 만나는 삶의 터닝포인트가 내게는 없었다.

 그런 내게도 태어나 처음으로 고향다운 고향이 생겼다. 스물두 살 때 일이다.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친구가 많아 반장을 도맡아 하던 나는 파란만장한 학창시절을 보낸 끝에 마음을 다친 채로,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한 채로 10대의 끝자락을 맞았다. 그래서 대학에 와서는 일찍이 마음의 문을 닫고 새내기답지 않은, 재미없는 1년을 보냈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들어간 동아리에서 감히 기대하지도 않았던, 내게는 과분한, 내 마음을 다 쏟을 수 있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덕분에 나는 다시 마음을 열었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했고,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나를 성장케 했다.

 그들과 일상을 함께 했던 캠퍼스 이곳저곳, 함께 밤을 새워 공부했던 열람실, 술에 취해 울고 웃었던 참살이길, 흔쾌히 하룻밤을 허락했던 친구들의 자취방까지. 첫 학기 어색하기만 했던 안암은 어느새 마음의 고향이 됐다. 사는 게 힘들어 밤새 울고 다음 날 내가 향한 곳은 안암이었다. 돈 많고 시간 많은 휴학생이라 어디든 갈 수 있었음에도 나는 굳이 6호선을 타고 안암으로 가서 친구와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시답지 않은 일에도 한참을 웃었다. 고향을 사전에 검색하면 총 세 가지 뜻이 나오는데 하나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안암은 그런 곳이 됐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 때로는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신나게 놀았고 또 때로는 시린 성장통을 견뎌냈던 기억이, 참 많은 이들이 베풀어 준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는 곳. 삶이 힘들 때마다 떠올릴 곳. 그래서 평생을 그리워할 곳.

윤예원 (문과대 영문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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