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변수 중 간과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확실성이다. 당장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정도와 삶을 둘러싼 조건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운신의 폭과 삶의 질이 결정된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수많은 불확실성 앞에 던져졌다. 개강, 준비하던 대회와 시험 등 일상이 무기한연기되는 사이에, 우리 삶의 주체가 자신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끝없이 확인당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도 엇갈리는 분석과 주장들 속에서 최소한의 사실을 믿고 최대한의 소문에 불안해한다.

  세상에 공평하게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빗물이 결국 더 낮은 곳을 찾아 고이듯, 불행도 중력을 따른다. 같은 일이 닥쳐도 감내해야 하는 불안함은 다르다. 위험과 죽음이야말로 불평등한 것이어서 삶의 최전선에 선 이들에게 먼저 찾아온다. 위생에 대한 정보를 해석하는 건강 문해력은 사회경제적 수준에 비례한다. 대리기사들은 코로나를 콜없나라 부른다. 쪽방촌에서는 무료 식사가 중지되었다. 노동시간이 60시간보다 줄어든 이들은 4대 보험의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다. 실낱같이 매달아왔던 예측과 통제의 끈이 끊어졌다. 한겨레 이문영 기자가 메르스 사태를 두고 일찍이 그랬듯, ‘총알에도 눈이 달려있다. 전쟁이 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날아가 박힌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먼저 사망한 11명 중 7명은 청도 대남병원 수용자들이다(312일 기준 국내 사망자 66). 시설은 자연 환기가 어려운 열악한 방에, 침대 없이 온돌에 환자를 한꺼번에 수용했다. 전염병이 날아가 박힌 첫 사망자는 20년 넘게 입원해 있던 무연고 조현병 환자로, 며칠 동안 폐렴 증상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장례식 없이 죽었다. 아주 위악적으로 말해, 이 죽음들은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죽음이다.

  질병과 불신의 포화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한국 사회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국면을 몇 차례 맞았고, 그때마다 재난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왔다. 단 하나 면역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애도를 위한 자리이다. 유념할 것들이 많은 시절에 유념할 것들을 더해본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뜨고 궤적을 좇을 것. 그래서 눈 없는 전염병에 눈이 달린 경위를 파악할 것. 숫자로 치환된 죽음에 둔감해지지 말 것.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지의 문제를 공공의 영역으로 가져와 함께, 그리고 정확하게 슬퍼할 것. 더 나은 우리를 상상할 힘이 아직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 말 것.

*글을 완성하고 나자 에이스보험 콜센터 집단감염 소식이 들려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떤 세상의 행동 지침이자 매너인 동안, 다른 어떤 세상에서는 그저 공허한 구호이다. 어쩌면 기만이다. 졸고의 뭉툭한 대안이 무참해졌다.

 

최형식(문과대 사회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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