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선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겨우내 가수 Y 씨가 화제였다. 90년대 초반, 음악적 표현과 무대 매너가 당시 사회정서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연예계를 떠나야 했던 그가 30여 년 만에 소환되면서 그 과정에서 겪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재조명되었다. 이 상황의 한편에는 지난 세대의 획일성, 경직성에 대한 지금 세대의 야유가 들어있다. 이런 정서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주변의 의도도 조금은 엿보인다. 그래서 이 일을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 복잡하다. Y를 소환하여 도닥이며 과거를 나무라는 지금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유연하고 포용력있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과거의 획일성은 이제 사라져서 누구라도 저만의 방식으로 마음껏 자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고의 경직성과편견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세대, 계층, 학벌, 심지어 남녀 사이에도 편견과 반목이 뿌리 깊어지고 있어 걱정이다. 선한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길 힘을 가진 우리 젊은이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바로잡아 나가길 간절히 기대한다.

  필자가 자주 가는 근처 공원에는 운동을 나오시는 노인들이 많다. 그중에는 휴대용 녹음기로 노래를 크게 틀고 들으면서 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며칠 전 아내와 산책을 하다가 공공장소이니 이 어폰 같은 걸 쓰면 좋을 텐데라며 불평 섞인 혼잣말을 하였다. 아내는 지나가는 말로 그러게요. 그런데 노인이라 보청기 같은 것 하셨으면 이어폰을 하기 어려울지 모르죠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작은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물론 우리는 과연 그런지 확인해 보지 않았고, 그 노인분은 보청기 때문에 이어폰을 못 쓴 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의 매너가 모자라 이어폰을 안 썼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같은 상황을 두고 그 사람의 입장을 좋은 쪽에서 한번 바라봐 주는사고의 유연함을 가졌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건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시인 안도현은 <양철지붕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통찰이 담긴 비유다. 타인의 인생 또한 그러하다. 그때 우리가 가수 Y 씨를 그렇게 유연한 마음으로 한번 바라봤으면 어땠었을까. 지금 우리가 세대, 계층, 학벌, 남녀 사이의 갈등을 대하는 태도도 결국은 거기서 출발해야 하는 건 아닐까.

  편견(偏見)이 대상을 바라보는 기울어진 시각을 의미한다면,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으로 관견(管見)이 있다. ‘대롱을 통해 내다 본다는 뜻인데, 생각이나 경험이 적어 시야가 좁은 것을 가리킨다. 사회에 나가 생업에 파묻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저마다의 대롱으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따라서 아직 배움의 기회가 열려 있고, 열정과 가능성이 충만한 시기에 새로운 경험에 힘써야 한다. 생각해 보면 삶 에서 어떤 계기는 언제나 우연 속에 들어있다. 당신의 일생을 좌우하게 된 누구를 만나거나, 지금의 당신을 있게 한 적성이나 취미를 발견한 결정적 상황들을 떠올려 보라. 대부분 우연일 것이다. 당신의 생을 풍부하고 가능성 넘치는 것으로 만들려면 스스로에게 많은 우연을 선물해야 한다. 익숙한 것에 대한 안주(安住)는 우연의 가능성을 빼앗는다. 유연하고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매일 한 가지씩이라도,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동안 해보지 않은 일을 해 보자. 시험공부나 스펙 쌓기에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루 한 시간씩만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좋은 책을 찾아 읽는 것은 어떤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만지는 대신 책을 읽는 젊은이는 미덥고 이쁘다. 드물어서 더욱 그렇다.

  편견(偏見)이나 관견(管見)을 극복하고 성숙한 인성(人性)을 갖추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고의 유연성이다. 요즘은 ‘FLEX’라는 단어가 자신감, 당당함이라는 의미로 바뀌어 유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알다시피 그 본뜻은 유연함이다. 그런데 이 둘은 절묘하게 서로 통한다. 기억하자. “삶의 경지(境地)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의 여지(餘地)가 먼저 필요하다. F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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