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장기화로 헌혈량이 줄자 관계당국이 혈액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월 중순부터 혈액 부족 소식을 전하는 언론보도가 나오며 대대적인 헌혈 캠페인이 벌어졌고, 국내 헌혈량이 잠시 상승했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은 혈액 적정 보유량인 5일분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로 ‘경계’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7년 전부터 이미 혈액 대란을 예고하고, 국내 혈액관리시스템에 변화를 촉구해온 사람이 있다. 최소수혈외과(외과 수술 시 불필요한 수혈을 지양하는 외과)를 지향하며 병원 단위 혈액 관리를 시행하는 고려대 안암병원의 박종훈 원장을 만났다.

박종훈 원장은 "환자의 혈액학적 특성을 파악해 숙고 없는 수혈은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질병관리본부의 수혈 가이드라인은 현장에서 어떻게 지켜지나요

(2016년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한 수혈 가이드라인은 혈색소(헤모글로빈) 수치가 7g/dL 미만일 때 수혈을 권고한다. 혈색소 수치가 7~10g/dL일 때는 환자 상태를 고려해 수혈 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10g/dL을 초과할 경우 대부분 수혈이 불필요하다고 명시했다.)

  “우리나라 수혈 가이드라인은 유럽, 미국 등 혈액관리 선진국의 가이드라인과 같지만, 국내 의료현장에서는 혈색소 수치가 10g/dL 이하만 되면 대부분 바로 수혈이 이뤄집니다.

  혈색소 수치 7g/dL과 10g/dL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데도 후자를 따르는 것은 오래된 관습 때문이에요. 수혈 역사 초기, 아담과 런디(Adam&Lundy)의 주장에 따라 ‘혈색소 수치 10g/dL 이하’가 수혈 기준으로 받아들여졌죠. 이 기준이 철회된 지는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7g/dL이라는 가이드라인의 기준도 어폐가 있습니다. 혈액 속 수분량에 따라 수치는 2g까지 차이가 날 수 있어요. 혈액량이 같아도 환자가 수액을 맞은 상태인지, 탈수 상태인지에 따라 다른 수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의 혈액학적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혈색소 수치 7g/dL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수혈 기준이 아니라 치료를 위해 의사가 고려해야 하는 여러 사항 중 하나일 뿐이에요.”

 

- 의료현장에서 수혈 가이드라인이 지켜지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수혈은 언제나 좋은 치료제라는 국내 의료계의 인식 때문이에요.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의료현장에 수혈이 투입되고, 1950년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수혈은 국내에서도 주요한 치료제로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국제적으로 에이즈 감염과 같은 수혈 부작용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고, 2010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가 나서서 수혈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유럽과 미국은 새로운 수혈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혈액 관리에 뛰어난 성과를 보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그에 맞춰 수혈 가이드라인을 도입했죠.

  하지만 정작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국내에선 아무도 관심이 없었어요. 모니터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정부는 여전히 헌혈을 독려하는 정책만 낼 뿐이었죠.

  가이드라인은 현장에서 주먹구구식으로 활용됐고, 이것이 문제라고 앞장서 비판하는 의료진도 많지 않았습니다. 의료계의 관행 또한 혈액 관리를 악화시킨 것이죠. 불필요한 수혈에 대한 의료진의 성찰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문제를 인식해도 수혈 없이는 위험할 수 있다는 공포심에 관습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 수혈이 어떻게 부작용을 가져오나요

  “물리적으로 타인의 혈액이 몸에 들어오면, 혈액이 빠르게 회전되지 않아 응고합니다. 이는 오히려 혈관의 흐름, 즉 혈류를 막게 됩니다. 또한, 혈액은 면역계에 작은 반응만 일으키고 끝날 정도의 단순한 조직이 아닙니다. 수혈 과정에서 혈액 속 200여 가지의 단백질과 수많은 세포의 정보도 함께 전달되는 거예요. 수혈과 동시에 몸에 열이 나는 것은 이질적인 물질에 대응해 면역계에서 격렬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을 보여주죠. 문제는 수혈 과정에서 이미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에게 수술 후 합병증과 감염이 쉽게 발생하고 이로 인한 사망률도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 안암병원에 환자혈액관리(Patient Blood Management, PBM) 시스템을 도입하였습니다

  “ 환자 혈액 관리(Patient Blood Management, PBM)란 환자의 혈액학적 문제점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입니다. 수혈 자체를 무조건 지양한다기보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고용량 철분제 등 다른 치료법을 고민하는 것이죠.

  기존에는 환자가 수술 후 출혈과 빈혈이 심하면 의사가 관행적으로 적혈구를 처방했고, 혈액이 즉시 도착했어요. 하지만 PBM을 도입한 현재는 의사가 적혈구 처방을 하면 혈액 대신 환자의 혈액학적 데이터가 먼저 전송됩니다. 의사에게 환자의 최근 혈액학적 변화를 보여준 후 그래도 수혈이 필요한지 다시 묻는 것이죠. 이 과정을 통해 의사는 숙고 없는 수혈은 지양해야 함을 상기하고, 결국 전체적인 수혈 시스템에 변화를 주게 됩니다. 현재 안암병원에는 자체적으로 수혈 관리를 담당하는 위원회도 마련돼 있어, 의사나 환자가 수혈을 최소화하길 원한다면 스텝들이 현장에 함께 들어가 수혈 대체치료를 돕고 있습니다.”

 

- PBM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령화가 심화되는 한국 사회는 필연적으로 혈액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헌혈의 90%는 30대 이하 청년층이 하고, 수혈은 대개 60대 이상 노년층이 받기 때문이에요.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시점에서, 혈액 공급에만 집중하는 정책만으로는 앞으로의 혈액 수급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수혈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치료 방식입니다. 수술 후 감염, 뇌경색, 사망 등 그동안 전부 수술 자체의 부작용으로 여겨진 것들이 수혈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분석은 이미 2000년대 이후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조건에서 수혈을 받은 환자와 받지 않은 환자들의 경과를 빅데이터로 분석했을 때 전자의 합병증 발병률이 두 배 이상 높다는 것이죠. 안암병원 정형외과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예로 들면, 2011년에는 환자의 46%가 수혈을 받았지만, 현재는 90%가 감소한 5% 미만에게 수혈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수혈 대신 고용량 철분제 등 다른 치료법을 사용한 환자들의 수술 후 감염률은 수혈을 받은 환자 대비 반으로 나타났어요. ”

 

- 정부에서 올해부터 수혈 적정성 평가를 시작합니다

  “혈액관리 필요성에 대한 의료계의 목소리가 커지자, 정부에서도 3년 전부터 혈액관리 시스템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속도가 빠른 것은 아니지만, 중앙정부 차원의 과제와 방향성이 변화하는 것 자체가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혈 적정성 평가란 모든 종합병원 이상의 병원에서 수혈이 가이드라인에 맞게 이뤄지고 있는지 평가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혈액 수급을 조절하고, 환자의 치료 성적을 높이기 위한 것이죠. 정부에서 수혈적정성 평가를 준비할 때, 3년 전부터 무수혈 센터를 운영해온 안암병원이 좋은 기준점이 됐어요. 우리나라 의료계가 안고 있는 불합리성을 해결하는 데 고대병원의 선구적인 노력이 보탬이 됐다는 점에 보람을 느낍니다.”

 

글│김영현 기자 carol@

사진│두경빈 기자 hayab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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