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 오노레 드 발자크

 

  ‘바람행함’, 그 무한의 굴레에 갇힌 우리는 욕망에 찌든 삶을 꾸려나가다가도 어느 시점에 다다라 이 모든 것이 덧없음을 돌연히 깨닫는다. 무얼 위한 싸움이었는가? 그래서 지금, 무엇이 내게 남았는가? <나귀 가죽>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라파엘의 인생을 놓고 함께 고민해볼 뿐이다.

  7월 혁명의 격동 이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혼란한 날이었다. 젊은 청년 라파엘은 자살을 결심하지만, 골동품상 노인에게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귀 가죽을 건네받고는 다시 삶을 이어나간다. 무언가를 원할 때마다 가죽의 크기는 줄어들고 그의 살날도 줄어든다. 소원 한 마디에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까지 그의 손을 잡아주는 듯했지만, 그들이 인도한 황홀경의 안개 뒤로는 낭떠러지뿐이었다. 욕망을 위해 존재의 파멸을 택할 것인가, 존재의 지속을 위해 욕망을 억제할 것인가? 나귀 가죽이 안겨준 절망과 달뜸 속에서 라파엘은 출구 없는 모순에 빠진다.

  소원을 들어주는 신비한 존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서사에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인간 본성의 속막은 욕구와 욕망의 피륙으로 직조되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고 행하고 그 결과에 울고 웃는다. 그 웃음과 울음 뒤에 찾아오는 목 뒤 서늘함에 잠시 멈춰서 생각한다.

  “무얼 위한 싸움이었는가? 그래서 지금, 무엇이 내게 남았는가?”

  <나귀 가죽>을 읽기 전에는 이 모든 것이 허공에 칼질하는 무의미한 싸움이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까봐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수년을 끝없는 입시경쟁과 등수 매기기 속에서 살았다. 할 수 있는 게, 할 줄 아는 게 딱히 없어서 남들이 반듯하게 닦아놓은 길을 걸으며 나름 치열한 싸움이며 승리였다고 위로했다. 만족스러운 대입 결과를 전리품처럼 자부했다. 이다음은 탄탄대로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망망대해에 표류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많은 선택지에 무력해졌고 어느 선택지를 자신 있게 고르기엔 무능했다. 입 밖으로 욕망을 내비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들고 와야만 할 것 같아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나귀 가죽>에서는 욕망을 둘러싸고 엄청난 판타지적 사건들이 일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서사 속에서 욕망이 얼마나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인지 깨달았다. 그간 욕망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해왔다. A라는 욕망엔 A라는 결과가 잇따라야만 하는 꽤나 비장한 행위라고 정의해왔다. 3부에서 라파엘은 가죽이 줄어들까 무서워 하루에 한 시간만 깨어있으려 한다. 사실상 깨어있는 모든 순간이 욕망의 연속인 것이다. 굳이 어떤 결과를 낼 필요도 없다. 라파엘과 달리 우리는 욕망의 대가로 목숨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자유롭게 욕망하고 행동하고 그 순간들에서 발견하는 행복과 씁쓸함에 웃고 울면 되는 것이다. 욕망은 발전 가능성이고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욕망의 부자유가 라파엘에게 안겨준 고통을 보며 이루고자 하는 바와 나아갈 공간이 있는 나의 현 위치에 감사했다.

  다시 나에게 묻는다.

  그간의 욕망들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은 무얼 위한 싸움이었는가? 싸움이 아니다.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 지금 내 손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굳이 무언가를 남겨야만 하는가, 바닷가의 모래를 한 움큼 쥐고 난 뒤에는 손바닥에 남아있는 작은 입자들이 금빛으로 빛나곤 한다.

 

김유림(문과대 불문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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