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지 못한 과거사 산적해

1기 때 접수 못 한 유족 많아

20대 국회 내 처리 불투명

  한국전쟁 전후 국가에 의해 가족을 잃었던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에게 과거는 트라우마.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은 빨갱이의 자식이란 이유로 연좌제에 시달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50년간 빨갱이몰이를 당해 왔으니 쉽사리 자신이 피해자의 유가족이란 사실을 떳떳이 밝히기 어려웠다. 장면 내각 때는 가족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나섰다가 더 혹독한 시련이 찾아오기도 했다.

  경주 보민단 양민학살 사건으로 아버지를 포함해 친족 22명을 잃은 김하종(·88)씨도 그중 한 명이다. 유족회 활동을 하던 그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한순간에 용공 분자로 몰렸다. 결국, 유족회 활동이 반공 특별법에 어긋난다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 받은 뒤 28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아들이 빨갱이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에 어머님께서 슬퍼하신 것이 가장 마음 아팠다는 그는 이후 재심을 청구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좌절을 겪은 유족에게 과거사위원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개인의 힘으로 50년 전 국가 범죄를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법무법인 지향 이상희 변호사는 한국 전쟁 동안 국가가 자행했던 범죄는 정권에의해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밝혀내기 어렵다며 민간인 학살사건을 밝혀내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했다.

  항일운동 시기부터 전두환 정부 때까지 공권력에 의해 국민이 피해받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만들어졌던 1기 과거사위는 2005121일부터 20101231일까지 활동하며 조사한 11075건 중 8450건이 국가가 자행한 불법행위였음을 밝혀냈다. 조사에 쓰인 시간은 첫 조사가 시작된 2006425일부터 2010630일까지 42개월이다. 조사가 끝난 뒤 과거사위원회는 종합보고서를 작성해 국회와 대통령에 보고했다.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도 트라우마를 딛고 과거사위의 문을 두드렸다. 1기 과거사위에서 조사한 11075건 중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은 8206건으로 전체의 73.4%에 달한다. 과거사위가 조사하는 사건은 대부분 민원 접수로 시작되는만큼 유족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였다.

  8000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했지만, 그마저도 빙산의 일각이다. 42개월만에 해결하기엔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 숫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1기 과거사위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했던 신기철 조사관은 과거사위 활동 당시에 다 규명 못 한 피해자만 4000명이 넘는다현재 확인 가능한 추가 희생자만 해도 8000명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인명 피해 규모가 컸던 보도연맹 사건은 정확한 희생자 집계 자체가 힘들 정도다. 최소 10만에서 최대 30만 명은 될 것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과거사위의 존재를 몰라 신청하지 못했다는 유족도 많다. 과거사위 조사는 2010년까지 진행됐지만, 사건 접수 기간은 2005121일부터 20061130일까지, 출범이후 단 1년이었다. 과거사위에서 근무했던 직원들도 홍보가 쉽지 않았다고 호소한다. 1기 과거사위 조사관을 지낸 안경호 조사관은 과거사위 출범 당시 홍보사업에 할당된 예산이 부족해 과거사위를 알리는 데 애를 먹었다과거사위 직원들이 일일이 지자체를 찾아다니며 홍보를 부탁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경북 고령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허복자(·72) 씨도 과거사위를 몰라 신청 기간을 놓쳤다. 그녀는 “1기 과거사위 때는 과거사위란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지방 신문을 통해 홍보했다고는 하는데 고향이 고령이라도 서울에 사는 나 같은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보느냐고 한탄했다.

  과거사위가 조사하는 사건 중 대다수가 피해자의 민원으로 시작되는 만큼, 접수 기한을 놓친 사건들은 대부분 조사하지 못했다. 더구나 민원을 받던 2006년에는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이 국가 상대 배상 소송에서 이긴 판례가 없었기에 접수를 포기한 유족이 많았다.

  1기 과거사위를 놓친 유족들이 바라는 건 오직 과거사위 재설치다. 더 늦기 전에 진실을 알기 위해서다. 아직도 많은 유해가 땅속에 묻혀 있다. 합천 보도연맹 사건으로 6살 때 아버지를 잃은 이모 씨는 아직도 아버지 시신을 찾지 못해 빈 무덤에 십자가를 꽂고 제사를 지낸다유해라도 찾고 싶다고 말했다. 충주에서 태어난 한국전쟁유족회 김복영 회장도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지도 않았을 때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진상을 규명하는 겁니다. 대체 왜, 누가 내 가족을 죽였는지 알고 싶어요.”

언제 통과되나국회만 바라봐

  현재 2기 과거사위 출범을 골자로 한 과거사법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과거사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는 데는 표면상 여야의 합의가 이뤄졌다.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행정안전위원회 간사인 이채익 의원은 자유한국당은 희생자에 대한 진실규명, 명예회복, ·보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에 적극 찬성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과거사법 통과가 미뤄지는 이유는 사건 조사범위와 조사기간 등에서 여야가 대립하고 있어서다. 여당은 노태우 정부 때까지 일어난 사건을, 야당은 전두환 정권 때까지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자고 주장한다.

  여야의 입장 차는 언제까지가 권위주의통치인지를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의 차이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진보 진영은 군인 출신인 노태우 대통령 시기도 권위주의 통치라 보지만, 보수 진영에선 민선으로 뽑힌 정권인 만큼 권위주의 통치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입장이다. 1기 과거사위 때도 권위주의 통치까지란 표현을 썼다가 논쟁 끝에 전두환 정권 때까지 일어난 사건을 다루기로 합의했다.

  위원 구성 방법을 두고도 논쟁이 치열하다. 여당은 1기 과거사위원회처럼 국회가 8, 대통령이 4, 대법원장이 3인 선출해 구성하는 15인 위원회를 주장한다. 반면 야당은 국회가 8, 대통령이 1인을 추천하는 9인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당 안을 따른다면 과거사위 내 야당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든다. 대통령이 지명하는 4인과 대법원장(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지명 3인을 포함하면 여당 쪽 위원이 이미 과거사위 절반을 차지한다. 국회내 여당이 임명하는 위원을 포함하면 대다수가 여당 측 위원으로 구성된다.

  전문가들은 일단 법을 빨리 통과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안경호 전 조사관은 세세한 사항은 시행령으로 정하면 된다최대한 빨리 과거사위가 설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위안부 사건이나 이산가족 문제처럼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도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유복자였던 피해 유족도 70대가 넘어가는 나이인 만큼 살아계실 적에 진실을 아시려면 빠른 입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20대 국회 내 과거사법이 통과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20대 국회가 종료되는 529일까지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법안은 모두 폐기된다. 19대 국회 때도 과거사법은 행안위조차 넘지 못한 채 폐기됐다. 2월 임시국회 내 신속한 처리를 바랐던 유족들도 “4월 총선 이후 추진해 볼 것이란 반응이 주류다.

  비관적인 전망에도 유족들은 이번 국회 내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태중에 아버지를 여읜 김복영 회장의 나이도 어느새 칠순을 넘겼다. 그는 비장한 목소리로 절실함을 강조했다. “꼭 통과 해야만 합니다. 이번에 통과 안 되면 절대 안 됩니다.”

 

김보성기자 greentea@

사진제공거창군청

인포그래픽김시온기자 ohn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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