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온몸이 떨려

곽정례(·80) 나주 경찰부대 사건 유족

  11075건의 사건을 처리하고 8450건의 진실을 규명한 과거사위원회(이하 과거사위)가 문을 닫은 지 10년이 지났다. 과거사위를 통해 묻혀있던 진실을 알게 된 유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1기 과거사위에서 진실이 밝혀진 유족들도 여전히 과거와 싸우고 있었다.

  “길이 하얗게 물들었어. 새하얀 소복을 입은 피난민들이 시장바닥을 가득 채웠거든.” 곽정례 할머니는 19507월을 곱씹었다. 10살 소녀였던 곽정례 할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군복 입은 남자 두 명이 집 안으로 쳐들어와선 나와! 나와!’ 하더니 아버지를 끌고 나가더라고,곧 총소리가 들리곤 아버지가 이놈들하면서 쓰러졌어. 가슴에선 쿨럭쿨럭하면서 피가 쏟아지고. 그러곤 한 놈이 총을 아버지 머리에 대더니 눈에 !’하고 한 발 더 쐈지. 난 부엌 문틈으로 그걸 보고 있는데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곽정례 할머니의 아버지인 곽준 씨(사망 당시 39)는 나주 경찰부대 사건의 희생자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나주 경찰부대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명확히 밝혀지지 않다가 과거사위가 열리고 난 뒤인 200615일 완도 지역 유족이 이 사건을 접수하며 공식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나주부대 사건은 나주에 주둔하던 경찰부대가 남하하는 인민군을 피해 후퇴하며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1950725일부터 이틀간 완도주민 42, 해남주민 55명 등 97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 죽은 민간인은 한 명도 없었다. 과거사위는 희생자는 전원 비무장·비전투원이었으며 희생자가 경찰을 보고 도망친 것 외에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자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고등법원은 국가가 나주부대 사건 유가족들에게 희생자 본인 2억 원, 배우자·부모·자녀 1억 원, 형제·자매는 3000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배상금을 대폭 깎았다. ‘8484(본인 8000만 원, 배우자 4000만 원, 자녀 800만 원, 형제자매 400만 원)’라 불리는 법원의 민간인 학살 배상지침 때문이었다.

  대법원은 나주 사건 피해 유족들이 다른 민간인 학살사건 유족보다 특별히 더 힘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이유로 삭감된 배상액을 내놨다. 유가족들은 분노했지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깟 돈 안 받으려다가 우리가 안 받으면 국고로 환수된다기에 받았지.”

  배상 절차까지 끝이 났지만, 곽정례 할머니는 과거사법 통과를 촉구하며 매일같이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든다. 터무니없는 배상금액에 대한 항의, 그리고 국회를 오가는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유족들의 사연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평생을 빨갱이의 자식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아온 그녀는 지금도 시위 하며 빨갱이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곽정례 할머니는 매일같이 국회로 나선다. “우리 아버지 목숨값이 8000만 원이 말이나 되나.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데.”

70년 지나고서야 밝혀진 아버지의 결백

장경자(·76) 여순사건 유족

  “장환봉 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닌 철도공무원으로서 혼란한 시기에 묵묵하게 근무했다. 더 일찍 명예를 회복해 드리지 못한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

  120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여순항쟁 때 목숨을 잃은 장환봉(사망 당시 29) 씨의 재심이 열렸다. 재판을 담당한 김정아 판사는 1948년 군법회의에서 내란과 국권 문란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장환봉 씨에게 내려진 판결을 번복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장경자 할머니의 아버지 장환봉 씨는 여순사건 때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의 철도원 동료들도 함께였다. 판결은 사형. 체포부터 형 집행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장경자 할머니가 세 살 되던 해였다. 어머니는 이승만이 죽였다고 말했지만, 장경자 할머니는 믿을 수 없었다. “설마 국가가 무고한 아버지를 죽였을까 했어요. 여순반란 때 죽었다고만 믿고 있었죠. ”

  과거사위가 열리자 장경자 할머니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사건을 신청했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죽은 뒤 암매장 당한 대다수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과 달리 장환봉 씨는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백을 밝혀내려면 재심을 청구한 뒤 형사재판을 통해 무죄판결을 다시 받아내야 했다.

  장경자 할머니는 2010년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을 함께 제기했다. 2014년 민사소송에서 승소해 배상을 받았다. 형사소송은 10년이 지나고야 결론이 났다. 올해 1월 광주지법 순천지원 판결이다. 장경자 할머니는 구순 넘은 노모와 함께 재판을 참관했다. 아버지와 함께 희생당한 동료 2인의 유족도 가족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재심을 청구했지만, 그날 재판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건 장환봉 씨뿐이었다. 재심을 청구한 2명의 유족이 세상을 떠나 사건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재판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결백을 밝힐 수 있었지만,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다. “ 판사님도 눈물을 흘렸지만 저는 담담한 표정으로 재판을 바라봤어요. 아버지가 천 번, 만 번 무죄판결을 받아도 살아 돌아오시진 못하시니 아무것도 달라지진 않잖아요. 명예회복이 됐다 정도로 위안을 삼는 거죠.”

진상규명, 이게 남은 내 일생 과업이에요

이경숙(·73) 고양 금정굴사건 유족

2018년, 국회 앞에서 이경숙 할머님이 과거사법 개정을 위해 1인시위를 하고 있다.

  19959, 고양 금정굴에서 유골이 쏟아져나왔다. 유해와 함께 묻혀있던 유품 중에는 이경숙 할머니의 시아버지가 쓰던 도장도 있었다. 그렇게 이경숙 할머니의 집안은 피해자 유족이 됐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진상규명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 시아버지의 죽음을 밝혀내는 일은 이경숙 할머니의 몫이 됐다.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은 인민군이 고양을 점령했던 기간에 마을 주민들이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고양경찰서가 주민들을 체포한 뒤 고양 금정굴에서 총살한 사건이다. 사건을 조사한 과거사위는 금정굴 학살이 경찰에 의해 벌어진 불법행위였으며, 희생자가 최소 153명에 달한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사건 초기여서 그나마 배상도 다른 사람들보단 많이 받았어.” 금정굴 학살사건은 과거사위에 처음으로 접수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이었기에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법원이 ‘8484’란 민간인 학살 배상 지침을 만들기 전이기도 했다. 금정굴 학살사건의 유족들이 받은 배상액은 본인 1, 배우자 5000만 원, 자녀 2000만 원이었다.

  금정굴 학살 피해 유족들은 십시일반으로 배상금을 출연해 금정굴 평화인권재단을 설립했다. “유해에서 도장이 나와 시신이 시아버지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어느 집안의 부모인지, 자녀인지 모르는 시신도 많이 나와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유해를 대신 발굴하고 신원을 찾아주는 거죠.”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과거의 일을 들춰내는 것은 트라우마다. 어쩌면 지우고싶은 기억일지도 모른다. 명예회복도, 배상도 끝난 지금 왜 아직도 다른 피해자들을 돕냐는 물음에 이경숙 할머니는 웃으며 답했다. “저한텐 일생의 과업 같은 거예요. 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유족들의 억울함을 밝혀내기 위해 싸울 거예요.”

 

| 김보성기자 greentea@

사진제공 | 이경숙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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