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에 대한 자만일까, 스스로의 안위에 아주 무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오는 전염병은 두렵다.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나는 감히 장담할 수 없다. 떠오르는 얼굴을 생각하며 마스크를 꼼꼼히 눌러쓴다. 내 전염병의 공포는 남겨짐에서 온다.

 엄마에게 종종 안부 전화를 하시는 외삼촌이지만, 지난 주말 걸려온 전화는 달랐다. 항암을 중단하셨다는 외삼촌 처남의 소식인가.’ 짧은 순간에 비보임을 직감했다. ‘설마 할아버지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초조히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올해 들려온 두 번째 상이었다. 떠나신 분은 한창 시절을 뒤로하셨다. 엄마 나이보다도 어리셨다. 갑작스럽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언제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곤 했던 왁자지껄한 웃음과 술이 낄 자리는 없었다. 어느 때보다 무거운 조화를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은 엄마를 바라봤다.

 “호상好喪이라는 단어 정말 이상해.” 어린 내가 단정적으로 던졌던 말에 엄마는 크면 다 알게 된다고 했다. ‘좋은 죽음이 어떻게 있는지 무지한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죽음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하는 나이, 떠나는 사람에게 홀가분한 발걸음이 있을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무지를 벗었기에 홀로 남겨짐을 더 잘 느끼기도 한다. 사실 어린 날 호상好喪을 해석한 방식으로 미뤄보면, 느끼지 못했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알았는지도 모른다. 남겨진 이에게 좋은 이별이 없는 것이었다.

 너 없이 못산다, 너 없으면 안 된다. 이 말들에 슬며시 숨긴 주어처럼, 남겨질 나를 호소하는 이기적인 말이 클리셰로 자리 잡은 것은 혼자됨의 공포가 크기 때문일까. 오늘도 잠식하는 전염병 속에서 괜히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며 부모님에게 애원 섞인 걱정을 늘어놓는다. 비록 이기적일지라도.

 

김예정 기획부장 breeze@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