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젠더 구조

일상적 성적 대상화로 이어져

여성 분노 표출은 합리적 저항

폭력 존재하는 현실 직시해야

 

  최근 성인 대상 불법촬영물 단순 소지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놓고 비판이 거세자, 일각에서는 현행법에 대한 비판이 여성들의 과도한불안에 따른 것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유포한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냐는 식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될까 우려하는 건상식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기획조정실 장다혜 기획팀장은 온라인 성폭력 연구 상담 사례 중 실제 발생한 피해가 없는데도 상담을 한 경우가 약 10%나 된다며 잠정적 범죄에 대한 여성의 불안양상을 설명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히거나,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전시될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젠더 구조가 일상적 자유 침해해

  신공화주의 이론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선 권력의 존재 자체가 여성의 자유를 훼손해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 가해 행위와 가해자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불평등한 젠더 권력 관계가 여성이 일상생활에서 잠정적으로 존재하는 피해 가능성을 절감하게 하는 것이다. 조계원(평화와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교수는 신공화주의 이론의 비지배의 자유개념은 대상이 권력 관계에서 이탈할 수 없는 상황에선 물리적 간섭 없이 권력관계 자체로도 충분한 자유의 손실이 일어난다고 본다고 말했다.

  여성을 열등한 이등 시민으로 규정하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남성연대 문화와 맞물려 오늘날에도 지속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제 사고방식, 여성의 신체와 이미지를 교환하며 유지되는 남성연대 문화, 이러한 구조가 돈이 되는 자본주의 현실이 문제라며 “‘네가 이런 짓을 한다는 걸 주변에 알리겠다는 말이 협박이 되는 것도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여성들에게 권력적 낙인을 찍는 가부장제 문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물리적인 디지털 공간에도 사회구조적 문제는 그대로 투영된다. 성범죄 영상물에 대한 수요가 넘쳐나고 공모 범죄가 용이한 네트워크 속에서 여성의 몸은 더 쉽게 상업화된다. 개인 정보 보안이 강화된 SNS, 채팅앱, 웹하드에서 성착취 영상물을 판매하는 사업자는 개인부터 조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번 텔레그램 사건의 박사방1인당 150만 원 정도 입장료를 받고 운영됐다. 김수아(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디지털 세계에서 여성을 착취해 돈을 버는 것은 확실히 수익이 된다운영하기도, 처벌을 피하기도 쉬운 디지털 환경에서 여성착취 산업구조는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의 몸이 언제나 접근 가능한 시각적 자원으로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현상은 일상적 성적 대상화 문제로 이어진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본문 내용과 상관없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이미지가 잘림 방지용(짤방, 게시글 삭제를 방지하기 위해 올리는 이미지)’ 사진으로 사용되거나, ‘피싸개(생리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 등의 용어가 거리낌 없이 등장한다. ‘n번방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분석된다. 김보명(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n번방 사건은 성범죄 영상물에 대한 소비가 최소한의 도덕적, 정치적 저항감 없이 이뤄질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줬다충격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적 재현에서 나타나는 여성 비하, 혐오와 연결돼있다고 분석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가해자들이 왜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착취, 통제, 군림하는 것을 즐기는지 고민해야 한다이러한 문화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위계를 정하고, ‘권력 효능감을 누리려 했다는 것도 우리 사회의 남성연대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전했다.

  현재 언론 보도의 양상이 성범죄 바탕에 자리한 사회구조를 감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성범죄가 구조적 폭력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사회에서 벗어난 일탈적 가해자가 존재한다는 표현이 구조적 본질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을 악마로 표현한 보도도 이에 부합하는 사례다. 김수아 교수는 미디어가 불필요하게 가해자 관련 정보를 보도하며 내러티브를 만들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불안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연이은 성범죄 사건, 여성들의 반응은 심리적 불안에서 나아가 사회적인 분노 표출을 향하고 있다. 디지털 장의사(의뢰인의 인터넷 기록, 온라인 게시물 등의 정보를 삭제하는 직업)를 고용하고, 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를 창단하는 등 시민으로의 권리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다.

  지난달 27일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n번방 담당 판사 오덕식을 판사 자리에 반대, 자격 박탈을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과거 오 판사가 강제추행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고 불법촬영과 폭행·협박 혐의에 집행유예를 선고해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중심으로 해시태그를 공유하며 이어진 연대에 청원 동의는 44만 명을 넘어섰고 법원은 지난 30, 사건을 박현숙 판사에게 재배당했다.

  김보명 교수는 이를 여성 분노 표출의 대표 사례로 꼽으며 여성들의 불안과 분노는 심리적이고 상징적이라기보다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이라고 풀이했다. 김수아 교수 역시 현재 드러나는 여성들의 반응을 불안보다는 불의에 대한 분노 표출과 권리 주장이라고 본다여성의 인권 침해를 중시하지 않는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동시에 시민으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해야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여성의 분노에 여성에게 동등한시민권을 보장하는 대응으로 답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여성은 대상이 아니다라는 전제 속에서 동등한 시민에게 가해지는 폭력 그 자체를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김수아 교수는 현행법의 형량도 문제지만, 성범죄 가해자에게 관대한 판결이 많아 성범죄가 중범죄라는 인식을 사회적으로 구성하지 못했다확실한 처벌과 권리침해 구제에 대한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성범죄 구성요건에서 성적 수치심을 삭제하고, 성적 자기결정권 자체에 초점을 맞춘 보호와 처벌을 보장하는 것이 선결과제로 꼽힌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인격권에 부합하는 반면, 성적 수치심은 여성의 정조와 관련돼있다는 해석이다. 오정진(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촬영이든 강간, 추행 같은 신체적인 행위든 인간으로서 보장돼야 할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가 처벌 기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시민 권리 보장을 위해선 여전히 부족한 여성 대표성을 제고해야 한다. 조계원 연구교수는 여성의 대표성이 늘어나는 과정에 있지만, 아직 여성 정책을 결정하는 주체는 남성 정치인이라며 “‘나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감정 이입과 서사적 상상력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신혜빈 기자 venus@

사진두경빈 기자 hayabusa@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