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의 외침엔 기층민의 목소리도 있었다
4월, 혁명의 외침엔 기층민의 목소리도 있었다
  • 이동인 기자
  • 승인 2020.04.12 2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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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절반이 무직자·하층노동자

주목 못 받고 역사에도 외면당해

  1960426,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소식이 전파를 타기까지 전국의 거리는 최루탄 연기로 자욱했다. 서울을 비롯해 마산, 대구, 광주 등 곳곳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학생들을 주축으로 터져 나왔다. 시위로 이승만 정권의 12년 장기집권이 끝났지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86명의 사망자 중에는 77명의 학생이, 94명의 기층민이 있었다. 절반이 넘는 사망자가 무직자와 하층노동자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언론의 외면과 전근대적 사고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1991년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3~4월 항쟁 기간을 통틀어 61명의 하층노동자와 33명의 무직자가 사망했다. 전체 사망자 186명의 절반을 넘는 수다.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고향을 잃은 이들이 도시로 몰린 상황에서 들이닥친 경기 침체는 당시 많은 사람을 빈민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에 크게 의존하던 한국은 1950년대 후반부터 원조가 줄며 침체기에 들어섰다. 1957년 연간 8%까지 성장하던 경제는 혁명이 일어난 19602%까지 추락했다. 허은(문과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전쟁 이후 인구가 도시로 집중됐지만, 적절한 산업화가 이뤄지지 못해 그들을 흡수하지 못했다며 당시 도시 빈민의 존재를 설명했다. 여기에 도시화가 진전됨에 따라 신문 보급률이 높아지고 정부 비판적인 언론이 성장하며 시민들은 부패한 이승만 정권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어려운 경제 속에서 3·15 부정선거로 정부의 부패마저 극심해지자 많은 빈민이 거리로 나왔다.

  기층민들은 시위의 양상을 격렬하게 만들었다. 학생들이 낮의 시위를 이끌었다면 기층민들은 밤 시위를 주도했다. 오제연(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밤 시위 동안 시위대는 경찰 관련 시설에 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거나 불을 지르는 등 지금껏 시민들을 억압하던 관공서를 주로 공격했다고 말했다.

  열렬했던 참여에 비해 기층민들의 목소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엘리트 학생들처럼 일관되고 분명한 입장을 내지 못했다. 언론과 학생에게도 외면당했다. 오제연 교수는 당시 언론은 학생에게 호의적이었던 반면 도시 빈민 등 기층민에게는 부정적이었다학생들의 의로움을 찬양하는 한편 도시 빈민의 과격함을 비판했다고 전했다.

  기층민의 참여를 외면한 태도에는 당시 한국사회에 남아있던 전근대적 사고의 영향이 컸다. 허은 교수는 그때는 과거의 신분제도 의식이 남아있었을 것이라며 당시 엘리트들은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나머지 구성원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만큼 기층민들의 투쟁은 사료로도 기록되지 못했다. 그들을 다룬 연구도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다. 허은 교수는 정권부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저항한 그들의 투쟁은 민주화 역사에서 주권재민의 의미를 크게 진전시켰다투쟁의 최전선에서 가장 많은 총탄을 맞은 기층민들이 왜 잊혔는지 주목하고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 이동인기자 what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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