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가 있던 19603, 고려대는 겨울방학이었다. 그때 대학은 지금과 달리 3월에 졸업식을 했다. 4월에 신입생을 받았다.

  부정선거 전부터 자유당의 음모는 알음알음 얘기되고 있었다. 불의에 가장 먼저 저항한 건 다름 아닌 고등학생들. 2·28 대구 학생데모가 일어났다. 마산에선 학생 9명이 사망했다. 김주열 열사도 이때 유명을 달리했다. 대학생들은 잠잠했다. 그때 대학교는 겨울방학이었다.

  하 수상하던 1960년 봄 고대생들이 대학생 중 가장 먼저 일어섰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안다. 엄혹하던 시대에 그들은 고대정신이란 일념 아래 부정부패에 분기탱천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1960418일 그날은 시절과 달리 날씨가 쾌청했다.

  두려움과 의로움이 공존하던 그때 고대생들은 이제 여든을 넘긴 구로가 됐다. 4·18의거 60주년을 맞아 의거의 산증인인 박찬세(법학과 55학번), 독고중훈(철학과 57학번), 이성춘(정외과 58학번), 박규직(상학과 59학번), 그리고 이준호(사학과 59학번) 교우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3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그들의 목소리엔 여전히 의기가 맥박처럼 울렸다.

 

'얼음 속 미나리가 싹을 키우듯

  겨울방학 동안 남쪽 소식은 시골 유학생의 입을 타고 고려대로 전해졌다. 당시 고려대엔 지방 학생이 70%가량이었다. 마땅한 통신수단이 없던 시절 남쪽 소식을 듣기 유리했다. 자유당의 부패와 인권 유린에 고대생들은 하나둘씩 분노했다.

  5개 단과대 학생대표들은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222일 정경대 총무부장 이재환(정외과 57학번) 교우는 안암동 개운사 입구 하숙집에서 정경대 학생위원장 이세기(정외과 57학번) 교우와 회동했다. 3·15 부정선거 음모에 분통을 터뜨리며 새학기가 시작하면 의거를 일으키자고 합의했다.

  322일엔 최초로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이 모였다. “2·28 대구 학생데모 이후 고등학생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데모가 일어나고 있다. 대학생으로서 후배들에게 부끄럽다. 자유 정의 진리를 교시(校是)로 하는 고대가 침묵만 하고 있을 것인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학생위원장들은 다방과 하숙집을 옮겨 다니며 거사를 도모했다.

  다른 대학과의 연합 시위도 도모했지만, 대부분 자유당 정권에 포섭된 상태였다. 자유당은 1959년 가을부터 주요 대학 학생회장단을 회유해 구국 학생총연맹을 출범시켰다. 서울대, 연세대도 여기 가담했다. “자유당에서 학생회장들에게 뇌물을 줘서 입을 틀어막았어. 대학생들을 학도호국단 체제 아래 넣기도 했지. 고려대는 이를 거부했어.” 이성춘 교우가 전한 당시 상황이다. 고려대는 타 대학과 달리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의 협의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집단지도체제였다. 학생대표 간 견제와 균형이 이뤄졌다. 자유당에 회유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다.

  타 대학 학생대표들은 고대가 먼저 나서면 우리가 뒤 따르겠다는 자세로 유보했다. 고대 학생대표들은 독자적으로라도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거사 예정일은 신입생 환영회가 열리는 416일이었다. 학생대표들은 신입생들에게 나눠줄 입학기념 수건을 준비했는데, 가운데 큼지막이 고대글자를 새겨 넣었다. 시위 때 학생들이 머리에 둘러쓰게 해 피아식별 수단으로 쓰려던 의도였다.

  하지만 학교에 기밀이 누설돼 신입생 환영회가 무기한 연기됐다. 자유당 정권은 학교에 최후통첩을 보낸 상태였다. 학생들이 시위할 경우 고려대에 폐교에 상응하는 강경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신입생 환영회가 연기되자 오히려 분위기는 고조됐다. 415일 학생대표들은 개운사 근처 농대 학생위원장 김낙준(농학과 57학번) 교우의 하숙집에 집결했다. 418일로 거사일을 미뤘다. 오후 1250분 본관 앞으로 집결, 몇 명이 모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교문 밖으로 나가 시위를 감행하기로 정했다. 실패하면 죽을지 모른다.’ 긴장감이 돌았다.

  주모자가 체포돼도 시위가 끊이지 않도록 학생대표들은 2, 3선책을 마련했다. 학생대표가 1, 이성춘 교우와 이준호 교우등이 2선을 맡았다.

  의거 당일, 학생대표들은 유서를 쓰고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선언문 작성을 담당한 박찬세(당시 고대신문 편집국장) 교우는 체포 1순위였다. “집을 나서면서 어머니께 신문사 일로 며칠 동안 집에 못 들어 올테니 기다리지 말라 했어. 그러면서 어머니 볼에 입을 맞췄지. 생전 처음이었어. 어머니께선 징그럽게 왜 그러느냐면서도 피하지 않고 함박 웃으셨어. 그 모습이 생각나네.” 박찬세 교우가 당시를 떠올렸다.

 

1250분 본관 앞으로!

  의거 당일 오전 9. 학생위원장 5명은 다시 김낙준 교우의 집에 모였다.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캠퍼스 곳곳에는 급고(急告), 12() 50() 전원(全員) 본관(本館) 앞에 집합(集合)할 사()’라고 쓰인 종이들이 나부꼈다.

  오전 11. 정치외교학회실에서 플래카드를 만들기 위해 학생 10여 명이 모였다. 박규직 교우는 각목 대신 빗자루에 플래카드를 묶기로 했다. 나름의 기지였다. “식당에 들어가니까 빗자루가 있더라. 번뜩했지. 빗자루에 플래카드 묶으면 시위가 즉흥적인 걸로 보일 거 아냐? 잡혀 가도 형량이 좀 줄지 않을까생각했지. 하하.”

  같은 시간. 독고중훈 교우는 도서관(현재 대학원 건물)에서 본관으로 가는 길목에 섰다. 손에는 전날 시내 충무로 기쁜소리사에서 빌린 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그가 외쳤다. “사랑하는 고대 학생 여러분! 나는 철학과 4학년 독고중훈입니다. 이제 우리가 지키고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우리의 대한민국을 위하여 궐기할 때가 왔습니다. 강의실에서, 도서관에서 모두 나오십시오. 본관 앞으로 나오십시오.”

  독고중훈 교우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그때 누가 와서 저지할지 모르니 보디가드로 학생 둘을 세웠어. 그런데 현승종 학생처장이 독고중훈!’ 하면서 달려오시는 거야.” 선생님 그림자도 못 밟던 시절이었다. 현승종 학생처장이 독고중훈 교우가 든 마이크를 뺏으려 해도 보디가드 학생 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 마이크는 빼앗겼지만, 학생들은 하나둘 본관 앞으로 모이고 있었다.

  1250, D-day. 1000명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 정경대 학생위원장 이세기 교우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독고중훈의 마이크를 뺏긴 터라 육성으로 크게 외쳤다. 스크럼을 짠 학생들은 우레 같이 교문을 뛰쳐나갔다.

드디어 동대문 로터리를 돌파한 시위대.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우리의 시위는 평화적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   사진제공│본교 박물관

 

경찰 유인책에 넘어가 깡패에 피습

  경찰과 처음으로 대치한 건 안암동 로터리였다. 경찰 100여 명이 시위대를 가로 막았다. 곤봉질에 부상자 10여 명이 속출했다. 대오가 흩어질 때마다 학생들은 플래카드 아래 다시 집결했다. 안암교 무렵에서 형님들 잘 싸우세요!”라는 대광중·고 학생들의 응원에 힘입은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격파하며 국회의사당으로 나아갔다.

  시위 초기 1선에 선 학생대표들은 대부분 경찰에 잡혀 갔다. 2, 3선을 마련한 덕에 시위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독고중훈 교우는 주동자가 사라지면 계속 새로운 주동자가 나타났다“1학년부터 4학년까지 똑같이 움직이고 똑같이 열정적이었지. 신입생들은 이게 고대구나!’하며 기쁜 마음으로 함께 했어라고 말했다. 박규직 교우는 지나고 보니 누가 주동자였는지 희미할 정도라고 회상했다.

  시위대는 동대문경찰서와 종로4가를 지날 무렵엔 깡패를,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에선 버스 바리케이드를 마주하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오후 2시경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 농성을 벌였다. 이성춘 교우는 당시 집회가 구한말 만민공동회를 연상케 했다고 전했다. ‘연행학생 즉시 석방을 외쳐며 시위대는 대정부 건의문을 결의했다. 체육부는 혹시나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평화시위를 폭력적으로 변질시킬까 우려해 경계를 지켰다. ‘고대수건이 외부인을 식별하는 데 도움을 줬다.

  거기서 유진오 총장은 학생들이 사회적 부정에 이처럼 항거할 용기를 가졌다는 것을 나는 도리어 좋다고 생각한다. 내무부 장차관과 서울 시경국장을 만났는데 곧 학생 처장이 연행된 학생들을 인계받아 학교로 갈 것이다. 학교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학생들은 항거를 치하한 유진오 총장에 감복했지만 돌아가자는 말에는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오후 7시 무렵까지 자리를 지켰다.

  학교로 돌아가는 길은 경찰차가 에스코트했다. 종로를 경유하는 길을 예상하던 학생들은 경찰이 을지로를 향하자 당황했다. 잠시 동요했지만 이내 따랐다.

  을지로 4가에 다다른 경찰차는 종로 4가로 방향을 틀었다. 시위대가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도착했을 때 도로 일대에 불이 꺼졌다. “나중에 깡패 두목 유지광한테 들었는데, 그때 을지로로 유도한 건 상부의 지령에 따른 거였어.” 이성춘 교우가 말했다.

  총성이 울리며 깡패 6~70명이 학생들을 덮쳤다. 몽둥이, 갈고리, 자전거 체인을 휘둘렀다. 학생들은 피투성이가 됐다. “그래도 우리가 젊은데 그냥 맞고만 있겠나. 고대생, 일어서라! 하고 반격했지.” 독고중훈 교우가 말했다. 싸움판이 벌어졌다. 학생 50여명이 부상 당했다. 조선일보 사진기자 정범태는 유일하게 당시 상황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쓰러진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국민들이 분노했다. 1960419일 나라는 뒤집어졌다.

  이후의 이야기는 역사가 스포일러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고 1년 뒤 고려대에 4·18 기념탑이 세워졌다. 박정희 군부는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유당 정권만 바꾸면 세상이 변하리라기대했지만 한국사는 다시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1987년 민주화까지 4월 혁명의 기억은 한국 민중이 계속해서 민주주의를 소환하고 불의에 투쟁하는 밑거름이 됐다. 4·18 의거는 고려대와 한국사에 길이 남을 민주이념의 금자탑이다.

 

  의거 당사자들은 당시 고려대가 대학 중 가장 먼저 나설 수 있던 건 고대정신 때문이라고 한입 모아 말한다. 눌린 자는 쳐들고, 굽은 것은 펴고. 눌린 자는 우리 사회의 억눌린 민중이요 굽은 것은 사회 모순과 부조리다. 업강부약과 정의구현이 바로 고대 정신이다.

  자유당 정권과 군부 독재는 무너졌지만 사회 모순은 아직 여전하다. 특권, 불공정, 양극화. 박찬세 교우가 “4·19는 미완의 혁명이라 말하는 이유다. 의거는 끝났지만 사회악에 맞서는 부정성(否定性)의 정신은 여전히 긴요하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회는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현재의 젊은이들이 정의로움을 아는가?”라는 독고중훈 교우의 말은 저항하기보다 모순에 짓눌린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가하는 따끔한 일침이다. 1960418일 이상을 실천으로 옮긴 고대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요청된다. ‘우리는 행동성을 결여한 기형적 지식인을 배격한다.’

 

김태훈편집국장 foxtrot@

사진양가위기자 fleeting@

사진제공본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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