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유치환의 <깃발>을 읽고 나에게 노스탤지어란 과연 무엇인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 위에 올라선 연희의 눈에 들어온 인파를 보고 느꼈던 전율, 201612월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느꼈던 민주주의의 장엄한 물결, 야자를 보이콧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휘적휘적 집으로 내려가는 와중에 마주했던 저녁노을, 그리고 대학. 이 중에서 특히 대학이야말로 나의 손수건이 가리키는 이상향이었다.

 사실 내 이상향 속의 대학은 지금으로부터 3~40년 전쯤의 그것이다.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필요하다면 거침없이 거리로 나서고, 젊은 혈기로 불의에 저항하는 그런 모습을 나는 남모르게 동경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억압적인 분위기가 그런 심리를 더욱 부추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활기록부를 인질로 잡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에서, 대학에 가서라도 이 세상에 제대로 개겨(?)봤으면 하는 마음이 우후죽순 자라났던 것일 테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은 그때의 대학과는 다르다. 더 이상 전경들과 학생들 사이에 보도블록과 화염병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만화사랑 동아리는 이젠 정말로 만화만 사랑한다. NLPD의 각축장이었던 총학생회 선거는 이제 투표율 미달로 무산되기까지 한다. 대학은 서서히 학문의 전당에서 취업의 관문으로 변해간다. 지진해일의 진원지였던 대학은 이제 세파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우리 사회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사실 고려대에 붙고 나선 대학이 어떻게 변했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새내기배움터, 뻔선뻔후, 입실렌티, 고연전 등등 새내기로서 마주할 아름다운 문화들 덕분에 내 가슴은 충분히 두근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두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다 망쳐버리기 전까진.

 결국 내 노스탤지어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해원을 향해 나부끼던 손수건은 코로나가 얌체같이 가져가 버렸다. 깃발을 잃고 삐걱거리는 깃대에 미역처럼 들러붙어 흐느적거리는 것은 사이버 강의뿐이다. 모니터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교수님의 목소리와 제자들을 위한 산더미 같은 과제만이 이상향과 현실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되어버린 것이다. 눈물이 찔끔 나는 현실이다.

 많은 새내기들이 코로나로 인한 오프라인 개강 연기에 신음하고 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입시의 늪에서 빠져나와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손수건을 한 장씩 잃어버린 모든 새내기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깃발>의 마지막 연을 빌려 코로나를 원망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

!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단 줄을 안 그는

 

권기유(문과대 사회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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