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은 우리의 소통 방식을 바꾸었다. 모바일 기기에 기반한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온라인 대화, 온라인 회의 등 온라인 소통의 비중은 일상뿐만 아니라 공적인 소통 생활에서도 점점 커지고 있다.

 온라인 소통은 대면 소통과 물리적 차이가 있다. 대면 소통은 직접적이다. 대화 참여자 간 서로 표정 등을 살펴볼 정도의 가까운 물리적 거리 안에서 소통이 일어난다. 또한 지금, 동시에일어나는 현재진행형의 소통 방식이다. 대면 소통은 항상 시공간을 공유한 상황에서만 일어나지만, 온라인 소통은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을 공유한 상황에서 많은 정보들을 전달받는다. 내 시야에서 수집되는 시각 정보도, 촉각·청각 정보도, 공기의 냄새까지도 모두 해석 가능한 기호들이 된다. 그러나 온라인 소통은 항상 제한된 사각의 프레임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이 많은 차이는 온라인 소통에 대면 소통의 규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서도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소통 규칙을 발견할 필요가 있었다. 젊은 세대들은 기술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른 만큼 소통 규칙도 빠르게 만들어 나갔다. 친한 사이 간 소통할 때 사용하는 언어 기호는 압축을 거듭하여 ㅇㅇ(‘을 의미함)’과 같이 자음만으로 이루어진 언어로 변화하기도 했고, 대조적으로 문법을 준수한 언어는 공적 소통을 위한 격식적 언어가 되었다. 언어를 넘어서는 정보는 이모티콘으로, 이미지로, 밈으로, 영상으로 전달하면서 흥미로운 소통 현상들을 만들어 내었다. 젊은 세대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절한 온라인 플랫폼을 찾아내 소통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리하여 소통 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하였으므로, 인간은 타인과 더욱 잘 소통하는 존재가 되었는가? 우리는 여전히 또래와 갈등을 일으키고 힘들어하며, 선배나 후배, 선생님과의 소통이 어렵고, 가족과의 관계에서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 부정적인 소통 문화 역시 드러나는 경로가 달라졌을 뿐이지 여전하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는 여러 사회적 현상, 과시 욕구와 사회적 박탈감, 디지털 공간에서의 왕따와 소외, 자신이 편드는입장만을 수집하는 확증 편향, 의견 양극화, 이로 인한 혐오 기반의 공격 등. 오히려 언론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디지털 공간에서의 사건들은 소통 문화와 규칙을 어떻게 형성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서 환기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 젊은 세대에게 온라인 소통의 방법규칙을 알려줄 선배 세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들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들이다. 기성세대들은 젊은 세대들보다 디지털 기술에 익숙하지 않다. 기술의 빠른 변화로 인해,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소통 상황에 직면한 모두가, 불과 5년 후에 또 어떤 소통 플랫폼이 대세가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답을 모른다.

 유일한 답이자 희망은 인간이 스스로 배우고 성찰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한 걸음 물러나 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무관하게 항상 사회적 존재였으며, 학습하는 존재였고, 유희적 존재였다. 소셜 미디어의 진화 속도는 인간이 얼마나 소통을 갈망하는 사회적 존재인가를 방증할 뿐이다. ‘관동별곡을 남긴 정철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여행 체험을 업로드하는 현대인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그저 기술이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문화를 눈앞에 펼쳐놓았다는 것은, 어떤 현상이든 항상 그 중심에 인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나는 타인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가? 내가 타인과 소통할 때 갈등을 겪는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내가 속한 이 시대의 문화는 어떠한가? 소통의 문제들은 새삼스러운문제들인가? 이렇게나 문화가 변화하는데도 변화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성찰적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것만이,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타인과 공유하며 또다시 성찰하는 것만이, 계속해서 변화해 갈, 그래서 누구도 답을 모를 이 문제 상황의 역설적인 해답이 될 것이다.

이지선서원대 교수·교양대학
이지선
서원대 교수·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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