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여행하다가 교회를 지나가는 길에 무덤들과 마주친 적이 있다. 처음엔 궁금했다. 묘지명은 모두 두 단락에 불과했다. “너는 누구냐, 넌 언제 태어나고 또 언제 죽었냐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작은 비석에 새겼을 뿐이다. 이끼가 오른 이곳에서 모든 신분의 고인은 파묻혀 버렸다. 살아생전 부자였는지 부랑자였는지는 죽음을 종점으로 둔 이 유희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무덤 앞의 장미꽃에는 보고 싶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나의 성장을 되돌아보면 어른들이 죽음에 대한 얘기를 회피해서 그런지 죽음이 나와 멀다고 여겨왔다. 나중에 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랑과 미안을 미처 표현하지 못했다. 10살쯤의 일이었다. 첫 장례식에 참가했다. 증조모는 새벽에 돌아가셨다. 화환을 바쳤고 화장했다. 나는 준비가 안 된 상태였는데 증조모의 사진을 이불 밑에 두고 현몽(現夢)해 달라고 빌었다. 당연하다고 느껴진 존재가 사라진 그 순간에 죽음의 맛을 보았다.

 안녕을 묻는 연락에 회신을 써 준 친구들이 있다. 인연이 끝난 사이지만 그 글을 왕왕 감상한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세월에 슬퍼했으며, 무뎌진 관계에 아쉬워했다. 놓친 안녕에서 생긴 유감은 옛일에 빠져들게 했다. 애당초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회상에서 여러 번 펼쳐졌다. 어렸을 때에 부모와의 관계는 애매했다. 엄마는 매서웠지만 나는 까불었다. 모진 말로 그 싫음을 던졌는데 마음에서 서로를 잊어본 적이 없다. 얼마 전 엄마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졸업하고 집에 돌아오니?”라고 물었는데 나는 주저했다. 큰 도시에서 취직하고 싶지만 그보단 날로 늙은 부모가 공들이던 양육을 보답할 수 없으면 또 얼마나 유감스런 일일까.

 <어린 왕자>에서 나온 별을 세는 사업가가 기억났다. 별에 누가 살고 있는지 개의치 않고 수익에 시달리는 사업가의 모습은 오늘 자본화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갈망하던 어떤 것도 생사 앞에 어쩌면 또 다른 실망일수도 있다. 곁을 스쳐가는 광경을 애써 소중히 하면 언젠가는 헤어진 인연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양가위 기자 fl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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