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3월 그해 봄은 몹시도 벅찼다. 정문 안쪽의 학교 운동장에 나무판을 죽 늘여 세워 놓고 합격자 이름 하나하나를 적어 방을 붙여 놓았었는데, 나는 거기서 이름을 찾은 후 입시 준비로 수도승 같았던 10대를 청산했다. 가슴이 터질 듯했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열정과 자만으로 아찔할 지경이었다. 내 스무 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고대생(高大生)으로서의 나의 발걸음은 기대만큼 가볍지 않았다. 입학한 초반은 매일 아침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정문을 지나야 했다. 전날 난사한 최루탄 때문이었다. 또 자기 마을에서는 이름자나 날렸다는 사학과(史學科) 동기들은 각지의 사투리를 구사하며 강렬한 개성을 발휘했다. 그 앞에서 난 그저 온실의 화초였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흔들리던 그때, 나는 지금은 사라진 본관 앞 인촌 동상 잔디밭에서 자루에 든 막걸리를 마시고 게워내길 반복하며 스무 살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늘 끝이라도 닿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스스로에 대한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 순간 나는 과감히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선택했다. 아버지의 입학 선물 때문이었다. 서양사를 전공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늘 역사학이 최고의 학문이라 자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사학과에 합격하자마자 영인본 <조선왕조실록>을 사주셨다. 나는 실록의 첫 장을 넘기고 깜짝 놀랐다. 한문(漢文)으로 도배된 <실록> 앞에 나는 문맹(文盲)이었다.

 스무 살의 방황은 아름답다지만 그 시절 나는 몰두할 곳이 필요했다. 나는 <실록>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전(古典)으로 눈을 돌려 시간을 고스란히 쓰면 적어도 머리는 차가워질 수 있을 거라는 소박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저마다의 사연은 달랐어도 청춘의 몸살을 앓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탱할 것을 찾으려던 우리는 서로 의기투합했다. 친구들은 그 당시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인연이었다. 고대생이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호사(豪奢)였다.

 결당(結黨)한 우리는 한문 강독 스터디를 시작했다. 정경대 후문 만화방 옆에는 촌스럽기는 해도 마음 놓고 떠들 수 있는 아치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었다. 그곳에 모인 우리는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논어> <맹자>를 소리 내어 읽고 뜻을 풀었다. 수긍할 수 없는 선현(先賢)의 말씀에는 저마다의 고집한 바를 들어 몇 시간이고 난상 토론했다. 백열등 불빛 속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에 우리만 오롯이 존재하는 듯했다. 다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스무 살이 저물어갈 즈음, 나는 학문으로서의 한국사에 매진하리라는 과분한 꿈을 또박또박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석탑 아래 동해(東海)로 떠날 준비를 마친 고대생이 되었다.

 20204, 백발(白髮)이 되어버린 중년(中年)의 나는 여전히 그때처럼 진달래와 개나리와 목련이 흐드러진 학교를 드나든다. 30년이 넘도록 같은 길을 가고 있고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내 인생은, 시리도록 찬란했던 스무 살 바로 그때 고려대학교의 문을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스무 살 청춘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설레는 기대와 절망스러운 혼란을 지나 두 발로 온전히 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그때, 나는 반짝반짝 빛났던 것 같다. 그러니 나의 학생이자 후배들이여, 젊은 날의 치기(稚氣)를 기꺼이 받아들이시라! 청춘의 시행착오를 부끄러워 마시라! 뒤돌아보면 스무 살 그 시절이 인생의 절정(絶頂)일지니!

 

 

 

 

 

 

 

 

 

 

김순남 교수· 문화유산융합학부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