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나 공감은 사치이니 함께 앉아 고독해 주는 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가적 재난과 혼란에, 당연한 줄 알았던 사람의 손길이,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는 소라게처럼 각자의 어두운 다락방 안으로 주섬주섬 기어들어 간다.

  기형도의 단 하나뿐인 시집에 끼어있는 이 작품에 눈길이 간 것은, 어둡고 텅 빈 다락방에서 꺼질락 말락 하는 등불을 찾은 것과 같았다. 시인은 진실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잿빛의 도시 한복판에 독자를 무책임하게 던져놓고는, 이 시에 부쳐 변하지 않는 것에서 희망을 노래하려 한다. 그래서 더욱 버겁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 같다. 함께 낯설어하고 절망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이 거대한 세상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 우리는 신음하고 온몸을 둘러싼 세상의 추악한 민낯과 매일 대면하며 경악한다.

  하지만 위험과 불안, 불신 속에서 방황하는 동안에도, 시간에 매몰되어 잊었던 본질은 고유의 빛깔을 지닌 채 기다리고 있다. 시인의 기타는 줄이 끊어져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지만, 자신의 본질인 소리로서 유기체의 존재를 알린다. 시인이 그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두운 희망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그것과 자신이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앞의 탈출구보다 무엇을 되찾고 싶은가라는 회귀적인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희망이란 두 글자의 무게를 견디며 본질을 돌이켜보는 일은, 철없는 낙관과 지독한 현실 사이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게 한다. 어떤 먼지도 푸른 종이의 푸른색을 바꾸지 못하듯이.

 

권유미(문과대 사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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