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최소 생성단위인 학과(전공) 단위로 분절해 운영하고 있는 기존의 교과(지식)중심 교육과정이 사회문제 해결 역량을 키우기 위한 역량중심 교육과정과 이를 지원하기 위한 융합적 학사구조를 강조하는 체제로 변화하는 흐름이 2000년대 들어서면서 두드러지고 있다. 우리 고려대를 포함하여 전국의 대학에서 시행되고 있는 자유전공학부, 복수·부전공, 연계·이중·융합·학생설계전공 등의 도입과 함께, 교양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재조명 등은 이러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견 매우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손동현(2019)이 최근 발간한 <대학교양교육론(철학과 현실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정 전문분야에서의 지식이나 기술만이 아니라, “이들 분야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연계시킬 수 있는 융·복합적인 지적 안목을 갖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창의적 사고능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보기에 문제는 융합교육의 활성화라는 정책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방식에 있다. 최근 필자는 학과 사무실과 교양교육원으로부터 가르치는 과목들에 대해 역량 지수를 배정해 달라는 공문을 받았다. 각각의 과목에 대해 공감소통, 사회적 책임, 융합적 사고, 창의적 문제해결, 글로벌 역량, 도전적 리더등 고려대의 6대 핵심역량 중 무엇을 얼마나 달성하기를 목표로 하는지 설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아마 우리 고려대뿐만 아니라, 2021년 교육부의 ‘3주기 대학 기본역량 진단평가를 준비하는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필자는 고등교육을 전공하는 특성상 연구 차원으로 혹은 대교협의 기관평가인증 심사위원으로 전국의 대학들에 갈 기회가 많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는 현재 고려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본부 차원에서 소수의 소위 평가보고서 집필 전문가가 해당 대학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 역량에 대한 정확한 실태 분석(예컨대 졸업생의 주요 진로와 취업처, 거기서 졸업생에게 요구하는 지식, 기술, 역량 등) 없이 그냥 연역적으로 소설 쓰듯이 몇 가지 그럴듯한 역량을 설정한다. 이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를 갖추지 못한 일선 학과에게 본부에서 설정된 역량을 배정하라고 요청하는 식이다.

  이에 따라 각 대학에서 설정한 역량은 앞뒤 수식어와 역량의 개수 및 구성만 조금씩 다를 뿐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학 유형과 역할을 막론하고 대개 창의성, 문제해결력, 협업능력, 인성, 글로벌 역량 등이 가장 빈번히 설정된다.

  하지만 동일한 창의성, 글로벌 역량이라고 하더라도 연구중심대학과 교육중심대학에 요구되는 역량의 수준과 내용이 과연 같아야 할까? 단적인 예로 전통적인 지식(교과)중심 교육과정에서는 같은 경제학적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고교 수준과 대학 수준에서 요구하는 교육의 목표, 내용과 수준(이에 따른 평가 목표와 기준)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량이 다른 학교급 간(예컨대 대학과 전문대학), 그리고 같은 학교급 내(예컨대 소위 SKY 대학으로 대변되는 연구중심대학과 지역의 중소규모 교육중심대학)라고 하더라도 학교의 기능과 역할, 재학생의 능력과 수준, 향후 진로 등을 고려해 달성해야 할 역량의 목표, 내용과 수준을 왜 보다 구체적으로 설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까?

  학교 차원, 학과(전공) 차원에서 역량중심 교육과정을 통해 달성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냥 교육부 평가 편람에서 역량을 설정하라니까 본부에서는 역량을 설정하고, 학과에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 기계적으로 이를 배분한다. 고려대 학생의 진로 실태와 고려대가 당면한 미래 환경에 대한 정확한 상황 분석 없이 역량을 설정하고 기계적으로 다시 이를 교과목에 배분하는 이러한 행태가 과연 학생의 편익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양성을 위해 바람직한 일인 것일까?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까닭은 현재 국내 대학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융합교육이 미래 사회의 변화에 대한 대학의 대응이라는 본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과 이를 위한 집행수단으로서 정부 재정지원 사업이라는 외적 요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촉발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의 변질과 형식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다. 학령인구 감소와 등록금 동결 정책으로 초래된 재정난 속에서 전국의 모든 대학들이 정부의 재정지원 사업 수주에 명줄을 걸고 있다. 일선 대학의 입장으로서는 싫든 좋든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정부의 정책 기조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국가, 사회 차원에서 보면 일종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고 할 수 있지만, 재원 압박과 교육과정 편성과정에서 교수들의 전통적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대학 입장으로서는 최선의 전략적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모럴 해저드를 조장·촉진하고 있는 것은 제도의 시행여부와 양적 지표에 치우친 정부의 평가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시행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시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대학을 대상으로 획일적이고 절차적으로 공정한평가를 추구하는 교육부는 이러한 대학의 모럴 해저드를 평가를 통해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순위를 매기기 위한 평가를 위한 평가에 만족하고 있다.

  결국 역량중심 교육과정의 강조는 내용적으로는 타당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형식적 평가 기제와 일선 대학들의 역량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 부족이 뒤얽혀, 정말 전국의 모든 대학들이 거교적으로 과목별 역량 배정이라는 그럴듯한 시간 낭비를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간 대학 구조개혁 평가와 대학 기관인증평가를 통해 역량중심 교육과정으로의 변화를 강조해 온 교육부와 대교협은 현재 대학에서 소위 역량중심 교육과정이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은 하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 역량중심 교육과정이 필요하고, 어떻게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변기용 사범대 교수·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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