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의 문 넘는 우리 아버지들, 당신을 위해 사세요!
은퇴의 문 넘는 우리 아버지들, 당신을 위해 사세요!
  • 이동인·정용재 기자
  • 승인 2020.05.25 0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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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기획

가장 큰 걱정거리는 ‘돈’

일에만 파묻혀 노는 법 몰라

은퇴는 자신 위한 삶의 시작

 올해부터 1960년생이 법정 정년인 만 60세에 접어들면서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한다.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 온 이들은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채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다.

 32년간 통신회사에서 근무한 A 씨는 지난 2016년 명예퇴직했다. 55세의 나이로 비교적 일찍 퇴직한 그는 그간 쌓아 온 경험을 살려 재취업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협력업체를 컨설팅하고 있어요. 앞으로 한참 더 살아야 하는데, 퇴직했다고 아예 경제활동을 그만둘 수는 없었죠. 경력 살려 일할 수 있어 좋지만, 세상이 원체 빨리 변하니 오래 이 일 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 60세 한국인의 기대여명은 평균 25.2년이다. 같은 해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발표한 은퇴자 평균 나이가 57세인 걸 고려하면, 은퇴 후 28.2년은 더 살아야 하는 셈이다. 돈 써야 할 날이 그만큼 남았다는 뜻이다.

 은퇴를 앞둔 56세 호주 이민자 B 씨도 돈이 걱정이다. 운영하던 학원을 폐업한 뒤, 용접을 배워 가족과 호주로 떠난 그다. “‘역이민이라고 하죠. 은퇴 후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애들은 호주에 남겠다 해서 재산 일부를 여기 남겨둬야 해요. 저를 위한 자금이 부족한 겁니다.” 호주에서 사설 연금을 하나 들고 있긴 하지만, 넉넉히 쓰기엔 부족할 것 같다. 나이가 있어서 취업에 큰 기대를 걸진 않습니다. 그래도 어떤 형태든 경제활동을 해야 하니, 여러모로 알아보고 있어요.”

 30년이 넘도록 건설현장을 누빈 C 씨는 올해로 61세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덧 은퇴를 고민할 때가 됐다. “은퇴하고 나면 시골 내려가서 과일나무를 심고 나물도 기르고 싶어요.” 은퇴 후 생활을 그리며 꿈꿀법한 탁 트인 시골풍경과 여유로운 일상. 상상만으로 미소 지어지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노후자금이다. 종종 들려오는 지인들의 나쁜 소식에 걱정은 더해간다. “퇴직 후에 식당 개업했다가 잘 안 된 지인, 주식 하다 퇴직금까지 날린 지인…. 그런 사례 많습니다.” 꾸준한 수입이 필요하다고 느낀 C 씨는 임대료로 고정수입을 만들기로 목표를 잡았다. “은퇴 후에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요. 4, 5년 더 일해서 준비할 겁니다.”

 

를 돌볼 줄 모르는 세대

 퇴직 5년 차에 접어든 A 씨는 ‘3M(Money, Membership, Mental)’을 강조했다. 돈도 돈이지만, 꾸준히 만날 친구와 건강한 정신이 행복한 은퇴 생활의 필수요소라는 것이다. “일로 만난 사람은 퇴직하면 거의 인연이 끊겨요. 퇴직 후에도 동료와 만남을 지속하려면 정서적 교류를 미리 형성해야 하는데, 그게 없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C 씨도 함께 시간을 보낼 친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은퇴 선배들에게 꾸준히 들었다. “회사 안 가고 집에만 있으면 얼마나 심심하겠습니까. 지인 한 분은 우울증까지 왔어요. 저도 걱정이 돼서 친구들한테 수시로 연락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B 씨 역시 귀국 후 인간관계가 걱정이다. “한국에 친구들이 꽤 있긴 하겠지만, 자세히는 몰라요. 은퇴는 외로움과의 투쟁이 될 겁니다.”
 자신이 은퇴했다는 사실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다. A 씨는 은퇴 직후 복잡했던 심정을 떠올렸다. “자유로운 생활이 좋긴 하면서도 막연한 불안감도 컸습니다. 출퇴근 시간 아닌 한적한 낮에 지하철 타는 게 참 어색하더라고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싶었어요.”

 이러한 상실감에 대해 성미애(한국방송통신대 생활과학부) 교수는 현 은퇴 연령층은 성장과 발전이 주된 가치이던 시대 속에서 일을 가장 중요시하던 세대라며 직업이 모든 정체성의 중심이기 때문에 은퇴를 커다란 역할상실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서초구 아버지센터 이하림 센터장도 명함 없는 모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퇴직과 동시에 타이틀이 없어지다 보니 은퇴자들이 많이 위축됩니다. ‘나 누구요하고 소개할 명함이 없으니까요. 명함 없이도 당당할 수 있는 모임이 몇 개 있는 게 중요하죠.”

 은퇴를 준비하는 많은 아버지는 자신을 위한 삶을 기대하지만, 정작 닥친 자유를 활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조차 몰라서다. A 씨는 수십 년간 일에만 열중했다. 자신이 유별났던 게 아니다. 여가조차 나태함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저 같은 베이비붐 세대는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나라 발전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런데 정작 자기는 돌보지 못했어요. 퇴직 이후 생활은 전혀 준비를 못 한 거죠.” B 씨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제 의지로 살았다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았거든요. 하고 싶은 걸 거의 못 했어요. 이젠 제 인생을 즐기고 싶어서 비교적 일찍 은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요성을 알지만, 여가를 개발하고 즐기는 방법을 오랜 시간 학습하지 못한 은퇴자들은 적극적으로 지역 커뮤니티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서초구 아버지센터는 센터를 주로 찾는 5, 60대 아버지들을 위해 요리나 합창 같은 취미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하림 센터장은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고민하시는 아버지들이 센터를 많이 찾는다사느라 바빠 자기를 못 돌아본 분들이 여유가 생기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성미애 교수는 은퇴 전부터 일과 일 외적인 부분을 균형 있게 다룬 이들이 실제 은퇴 생활에 잘 적응한다고 조언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앞으로도 행복할 가능성이 커요.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은퇴하고 나서 해야지라며 미루는 분이 많은데, 그땐 여러 학습 기능이 떨어져 힘듭니다. 은퇴 후도 삶의 연속이에요.”

서초구 아버지센터에서 아버지들이 서툴지만 즐겁게 요리하고 있다.
서초구 아버지센터에서 아버지들이 서툴지만 즐겁게 요리하고 있다.

 

몰랐던 모습이 있더라고요
 은퇴가 처음인 건 가족도 마찬가지다. 자녀들은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은 갑자기 많아졌는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렵다.

 이보라(사범대 교육학과) 교수는 관계는 한순간 정립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아버지가 자식들과 꾸준히 대화해오지 못했다면 자식이 아빠 왜 저래하면서 밀어낼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무시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고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거죠.”

 은퇴 전 가족과의 소통 방식은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대하는 가족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월든심리상담센터 양의주 센터장은 정서적인 소통이 있던 가족은 은퇴 후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을 때 서로 지지하고 함께 해결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반면 돈을 벌어 준다는 책임에 몰두해 가장이 권위적으로 소통한 가족은 쉽게 마찰이 빚어졌다. “은퇴자는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에 고통을 느껴 스스로에 화가 납니다. 화는 가족에게 표출돼 배우자나 자녀와 일방적으로 소통하게 되죠.”

 가족들은 상황이 바뀌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이보라 교수는 은퇴자가 예전과 똑같을 거란 기대를 하는 데서 갈등이 많이 생긴다이젠 상황이 변했고, 거기에 적응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유튜브 채널 거누파파네에서 은퇴한 아버지와의 생활을 영상으로 담고 있는 최세화(·26) 씨도 처음엔 아버지와 온종일 함께 있는 게 낯설었다. “아빠가 갑자기 24시간 집에 있게 됐잖아요. 아빠랑 안 친한 건 아닌데, 그런 환경이 되게 어색했어요.” 붙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몰랐던 모습들도 보게 됐다.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다. “전혀 몰랐는데, 아빠가 유머가 되게 많으시더라고요. 엄마도 그런 줄은 모르셨대요.” 최세화 씨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0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아빠가 은퇴 후로 많이 바뀌셨어요. 어쩌면 제가 지금껏 아빠를 잘못 이해하고 있던 걸 수도 있죠. ‘아빠는 나랑 안 맞아!’ 하는 생각이 있었더라도 잠시 접어두고 새로 관계를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을 뒤로한 채 은퇴자들은 새로운 진로를 찾는다. 조금 느긋하지만, 의욕은 가득하다. 곽성근(·55) 씨는 은퇴 후 50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노후대비도 할 겸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 몇몇과 정보를 나누려 만든 공간인데 어느덧 회원 수가 1 명을 넘겼다. “회원들이 여러 고민도 많지만 정말 재밌게, 열심히 사세요. 은퇴는 세상과 동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삶을 시작하는 거예요.” A 씨도 덧붙였다. “물론 지금도 걱정거리가 있긴 하죠.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태껏 몰랐던 자유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글│이동인·정용재 기자 press@

인포그래픽│윤지수 기자 choco@

사진제공│서초구 아버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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