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의 백묵원>(1944)을 살펴보려면, 먼저 이 작품을 쓴 브레히트의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1954년에 그는 이 작품을 이렇게 설명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비유극은 아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전체 이야기가 서막의 계곡을 둘러싼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의 핵심이 지혜로운 어떤 방법을 제시함을 알 수 있다. 눈앞에 일어나는 논쟁에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어떤 태도 말이다.”(이재진, <브레히트 : ‘코카서스의 백묵원에 나타나는 모순성>, ‘독일문학’,한국독어독문학회, 1993, 656.)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원나라의 <석필이야기>를 브레히트가 특유의 극중극 형식으로 번안한 작품이다. 외화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코카서스에서 계곡 소유권을 놓고 벌어지는 두 농장의 갈등염소사육 집단농장 갈린스크의 대표들과 과실주 재배 집단농장 로자 룩셈부르크의 회원들을 그린다. 내화는 가수가 등장해 이와 관련된 중국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하녀 그루쉐와 재판관 아쯔닥에 관한 백묵원의 고사다. 아쯔닥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다가 나중에야 친권을 주장하는 총독 부인과, 반란 세력으로부터 아이를 지킨 그루쉐의 다툼을 재판한다. 그는 백묵으로 그린 원 안에 아이를 두고 두 사람에게 잡아당기도록 명령한다.

  총독 부인은 아이를 세게 잡아당기지만, 그루쉐는 아이가 다칠까봐 손을 놓는다. 그 모습을 본 아쯔닥은 그루쉐가 아이의 엄마라고 판결을 내린다. 브레히트의 희곡은 우리에게 익숙한 솔로몬의 재판을 반대로 뒤집은 결말을 내놓는다. 아이의 양육권은 양심에 근거한다. 친권은 누가 아이를 낳았느냐와 상관없이, 누가 아이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다. 이는 변증법적 방법론을 따르는 브레히트 서사극의 양식과도 결부된다. 브레히트는 비판이 곧 세계의 변화 가능성으로 이어져야함을 강조한다.

  “세계의 변화 가능성은 세계의 모순성에 있다. 사물, 인간, 사건들 속에는 그들을 지금 상태의 그들로 만들며 동시에 다르게도 만들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잠재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발전을 하고 있고 현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까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그 자체 내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달라진 것, 그 이전의 것, 현 상태와는 적대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기선 옮김, <서사극과 변증법적 연극>)

  베르톨트 브레히트 작품의 외화에서 코카서스의 계곡 소유권이 어느 집단에 귀속될지는 미정으로 끝난다. 이런 미결정의 상태는 브레히트가 주목한 사건의 잠재성 보존과 맞닿아 있다. 멈춘 것이 아니라 전환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중이다. 잘 보존된 잠재성은 지혜로운 본보기를 길잡이로 삼아 새로운 사건으로 변모한다. 생각할 때와 나아갈 때를 구별하는 현명함이 중요하다. 판단력 없이는 모순의 한가운데를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허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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