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호 고대신문은 칼럼의 스타일이 명확히 나뉘는 신문이었다. 10면 ‘종단횡단-학교 정문 앞 작은 소녀상’과 ‘수레바퀴-진정한 공정을 말하기 위해선’은 같은 지면에 같은 고대신문 기자들이라고 하지만 칼럼 스타일이 전혀 다르게 게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칼럼의 주제와 구성을 떠나 접근방식에서 종단횡단이 보다 뛰어났다. 기자들의 칼럼은 현장성이 생명이다. 뜬구름 잡는 식의 접근은 독자로 하여금 실소를 띄게 만든다. 독자들을 가르치려 덤벼서도 안 된다. 표면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독자들을 향해 기자가 있었던 현장은 어떤 상황이었고, 이런저런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게 훌륭한 칼럼이다.
석학이나 대학자가 쓰는 칼럼이 아닌 이상 거대담론을 원고지 5매 정도에 담을 수 있는 능력은 단언컨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칼럼을 쓸 때는 항상 겸손하게 독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감정을 논리정연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레바퀴는 ‘데스크 칼럼’이라고 높게 봐주더라도 지나친 면이 있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비례와 평등을 논하는지 칼럼 처음부터 끝까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
칼럼을 쓸 때는 늘 겸손해야 한다. 독자들은 기자보다 더 뛰어나다. 그럼에도 칼럼을 보는 이유는 살아 있는 현장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즉, 기자 칼럼은 현장이 담겨야 한다.
사설도 짚고 넘어 가보자.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의 주장을 옹호하는가 싶다가 어느새 서로 양보하라고, 그게 좋은 의회정치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성언론 어느 사설을 옮겨다 붙인 것 같은 사설을 대학언론 지면에서 보고 싶어 하는 독자는 없을 테다. 아카데믹한 근거를 들어 주장을 폈다면 기성 언론들이 숨죽여 봤을 사설이 됐을 것이다. 미국 의회의 상원 구성과 그 배경, 우리보다 오래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서구의 사례를 근거로 주장을 폈다면 하는 아쉬움이 깊다.
사설은 어느 칼럼에 빗댈 수 없는 신문의 얼굴이다. 어느 하루 저녁에 급하게 소재와 주제를 잡아 기존에 나온 보도내용을 ‘우라까이’할 성질이 아니다. 한 주간 주요 이슈를 숙고해서 아카데믹하게 풀어내 전국 대학신문들과 일합을 붙는 대표 격인 코너다. 자신이 없으면 사설을 없애는 게 낫다. 기성 언론도 사설을 없앤 경우가 종종 있다. 사설이 엉망이면 신문사의 밑천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기 때문이다. 이번 사설을 작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여러 차례 지적했던 인터뷰 기사의 형식을 다양하게 시도했다는 점에서 기쁘다. 조언이 잔소리로 들리면 발전이 없지만, 뼈에 새기면 발전하는 조직이 된다. 한 학기 동안 고생한 기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송종호(서울경제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