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가장 과학적인 사람조차도 한순간에 비과학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떠올린 사랑의 성급한 정의다. 나와 생면부지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의 주도권을 흔들어버리는, 황홀하면서도 위태로운 찰나의 순간. 사랑은 그렇게 불쑥 감정의 문을 두드린다.

  사람은 왜 사랑을 하는가. 로미오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영화 <클래식(2003)>의 주희를 평생 가슴앓이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인간은 위험 회피적인 동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변에서 사랑을 위해 지독한 상처를 무릅쓰고 사랑에 목매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 것일까? 이 주제를 논함에 있어서, 다행히도 드 보통은 진화 생물학적 담론을 도입하여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클로이)의 사랑을 이기적 유전자의 교묘한 큰 그림으로 전락시키는 낭만파괴적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다. 드 보통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겪게 되는 내면의 심리 구조를 가감 없이 해부하는 직관적인 인문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사랑이 등장하는 순간, 논리는 삶이란 무대에서 기존의 굳건한 지위를 잃어버린다. 책 속의 남자주인공처럼 사랑에 도취된 나약한 인간은 사랑하는 상대방을 이상화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확증 편향에 빠지는 셈이다. 상대의 불완전함은, 그것을 인식하더라도 은근슬쩍 망각의 주머니 속으로 넣어버리고 개인의 상상력과 자신이 원하는 관찰 결과만을 토대로 상대방을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격상시켜 버린다. 그렇게 상대방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가장 소중한 보배가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프로디테는 변덕이 심하다. 사랑의 여신은 극소수의 인간들에게만 죽음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을 허락하고 대다수 인간에게는 어느 순간 사랑을 거두어 가버린다. 그 방식은 다양하다. 불륜, 권태, 의심, 갈등 등 무수히 많은 비극적 결말의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책의 주인공들도 그 비극을 피하지는 못했다.

  이제 다시 이 글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통계적으로 비극을 맞이할 개연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왜 사랑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무한할 것이다. 하지만 드 보통이 언급한 하나의 견해를 소개하겠다. 사랑은 완전한 나를 발견하기 위한 대담한 시도가 될 수 있기에 의미 있는 낭만적 행위라는 것이다.

  타자 없는 의 성립은 공허하다. ‘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의의 타자가 이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자, ‘의 정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특별한 타자만이 완전한 의 발견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같은 타자의 후보로 적합한 것이 바로 사랑하는 상대방이라는 것이 드 보통의 견해가 아닌가 싶다. 독자들에게도 묻고 싶다. 우리는 과연 왜 사랑을 하는 것일까. 그 고민의 시작을 이 책과 함께 하길 권한다.

“ 낱말 하나가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 말은 사랑이다.”

-소포클레스

김정호(경영대 경영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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