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훈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의의 이름으로 세워졌던 디지털교도소가 정의의 심판으로 현실의 교도소에 수감될 상황에 처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즈음에 출범한 디지털교도소는 니가 사람이냐’, ‘이게 나라냐는 극강의 비난 수위가 그 계기가 되었을 거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시킨 성범죄자의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분노가 사이버교도소의 문을 열게 한 것이다.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악성 범죄자를 나라가 온전히 응징하지 못하니 시민이 나선다는 취지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의 민얼굴을 신상 공개로 드러내 법치국가 사법 체계가 못다 한 형벌을 부과하고 집행하겠다는 것이다.

  장이 열리자 신상 공개와 함께 협박 전화나 문자 테러, 욕설 댓글로 공감을 표하는 분노가 모여들었다. 예상되는 폐해가 지적되기는 했지만, 현실의 법정과 교도소가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가상의 사설교도소가 응징하고 복수해 주겠노라 선언했을 때 환영의 목소리가 더 컸다. 응보와 복수본능에 터 잡은 중형 요구에 미치지 못한 국가형벌권에 실망한 피해자들이었다. 자신도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사회적 매장에 방조한 시민도 적지 않았다. 흉악범들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이 개인정보를 찾아내고, 퍼 나르고, 그리고 비난의 화살을 쏴댔다. 신상공개와 집단린치, 그리고 마녀사냥이 그들의 응징 수단이었다.

  정의의 이름이라도 사적 제재와 복수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성범죄자, 살인자, 아동학대범과 같은 흉악범이라도 사법 체계 안에서 유죄판단을 받아야 할 국민이자 시민이다. 결과의 정의도 중요하지만 절차적 정의 또한 무시해서는 안 될 가치이기 때문이다. 악마라는 낙인으로 법적 절차도 없이 형을 집행하는 탈 문명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독재국가도 형식적으로는 법과 절차를 거친다. 디지털교도소는 성범죄의 양형기준도 무르고 유죄가 확정된 성범죄자에 대한 형량도 관대하다는 분노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아직 수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자, 재판이 끝나지 않은 피고인도 신상공개의 대상이 되었다. 사적 심판으로 유죄선고를 내리고 형을 집행하려다 보니 검증이 부실해 무고한 자들의 신상이 잘못 공개되거나 피해자의 말만 믿고 가해자가 되는 사례도 생겨났다. 정의의 탈을 쓴 여론재판이 자행되었다. 엉뚱한 사람도 걸려들어 마녀사냥을 당하고 디지털교도소에 갇히기도 했다. 다행히 그들이 덧씌운 혐의가 수사로 벗겨진 피해자도 생겨났지만 훼손된 명예는 회복 불능이다.

  급기야 대학생이 무고함을 주장하며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디지털교도소는 피해자의 확인을 거쳤다며 지인능욕범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그렇다면 범인 같은데해야겠지만 그것도 진실과 정의를 찾아내는 사법절차에서 확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법치주의다. 범죄자도 헌법으로 보호받는 국민이자 시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명사회가 취하고 있는 원칙이자 국가이념이다. 수사와 재판이 피해자의 주장대로 진행되거나 사실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주장은 증거로 입증되어야 비로소 사실이 된다. 성범죄의 수사와 재판에서 피해자 중심이란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옳고 절대적 진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쨌든 여자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왜 저항하지 않았어, 따라갔잖아, 옷차림이 왜 그래 등등 지나친 남성중심주의와 가해자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라는 얘기다. 피해자 관점이란 피해자의 고통을 존중하고 피해자의 진술을 피해자의 처지에서 듣고 나서 판단하라는 뜻이다. 그래야 오판을 피할 수 있고 진실을 찾아 정의를 세울 수 있다.

  귀한 젊은 생명의 희생으로 촉발된 관심과 비난이 불법 사이트 폐쇄와 수사로 이어졌지만, 디지털시대에 언제든지 어떤 형태로든 재등장할 위험성은 남아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마녀사냥과 집단린치는 끊이질 않는다. 신상 털기와 악성댓글로 명예훼손을 넘어 생명까지 앗아가는 사례가 적지 않지만 표현의 자유가 늘 방패막이다. 사이버공간이라도 공격대상을 마주하고 있다고 상상하라. 역지사지하면 익명성에 기댄 언어폭력의 자유란 방어막이 걷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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