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니까, ‘퀴어 영화’ 만든다
존재하니까, ‘퀴어 영화’ 만든다
  • 송다영 기자
  • 승인 2020.09.19 23: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인규(문예창작과 05학번) 영화감독 인터뷰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동성 간의 애정을 소재로 하는 퀴어영화는 여전히 국내 영화계에서 비주류다. 영화에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은 차치하더라도, 투자와 제작 과정에서부터 난관에 부닥친다. 고생 끝에 영화를 완성하더라도 흥행은 기대하기 힘들다.

  백인규 감독은 입봉작부터가 퀴어영화였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퀴어영화만을 만들어왔다. <퀴어영화 20>, <퀴어영화 캔디>, <퀴어영화 나비>, <퀴어영화 뷰티풀>. 그가 만들어온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정체성을 감추기는커녕 맨 앞에 내세운다. 퀴어영화를 왜 만드냐는 질문에 백인규 감독은 대답했다. “존재하니까요.” 그에게 퀴어영화를 만드는 건 누아르 영화나 멜로 영화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회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백인규 감독은 “우리 사회에 퀴어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듯, 퀴어영화 제작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퀴어 영화제작, 응원으로 버텼다

  학생 시절 백인규 감독은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부 때는 문예창작과, 석사 때는 심리학을 전공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입대 전 호기심으로 참여한 스마트폰 영화 제작 워크숍에서야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영화를 찍을까 고민하던 차, 어릴 적 재밌게 보았던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가 떠올랐다.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가 한국에 더 많아졌으면 하는 소망에서 퀴어영화를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다.

  때는 2013, 마침 한국에 텀블벅 등의 크라우드 펀딩이 생기고 있는 시점이었다. 기획안을 올리자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호응에 힘입어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 전문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스태프들을 섭외했다. 어느 순간에야 지금 만들고 있는 게 단순한 스마트폰 영화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첫 번째 단편 <퀴어영화 20>을 찍었다.

  처음 퀴어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상처받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지인들에게 말을 꺼내자,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영화를 만들겠다고?’ ‘퀴어영화가 아닌 퀴어영화를 만든다는 데서 놀라움을 표했다. 오히려 크라우드 펀딩에 성공하고 영화가 관객들에게 사랑받자 지지와 격려가 쏟아졌다. “저를 잘 아는 주변 분들이 응원해주셔서 힘을 많이 받았어요.”

  물론, 투자를 받지 못해 제작비가 부족할 때, 무차별적인 악플에 시달릴 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팬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많지는 않아도 꾸준히 상영회에 찾아오시는 분들을 보면서 힘을 많이 받았어요. 계속해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팬으로 <퀴어영화 20> 상영회에 찾아왔던 고등학생을 꼽았다. “제 영화가 청소년 관람 불가거든요. 결국, 영화는 못 보고 행사 끝나고 나서 배우들만 구경하고 갔는데, 그다음 영화 <퀴어영화 나비> 때는 성인이 돼서 왔더라고요.”

 

  인간 군상을 인물에 담아내

  영화 비전공자인 그에게 교과서는 현장이었다. 직접 전문감독들을 찾아가 질문하고, 편집과 사운드 과정을 어깨너머로 보며 기술을 익혔다. “배우는 과정에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오히려 연극영화과 출신이었다면 학교 시스템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 같아요.” 영화계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는 어떤 시스템에도 편입될 수 없었다. ‘99필름이라는 퀴어영화 제작사 창업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배급, 비용 처리, 계약 체결을 하기 위해 회사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전까지 소외됐던 그였지만, 회사를 만들고 나니 협력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정신 차려보니까 기획하고, 제작하고, 회사를 차렸네요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영화엔 서로 다른 인간의 성격, 그것을 명확히 투영한 인물이 존재한다. 백인규 감독이 제작한 <퀴어영화 뷰티풀>의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평범해, 도도한, 최상위이다. 대충 지은 것 같지만, 오랜 시간 고심한 작명이다. 그는 인물 하나하나에 인간 군상을 함축해 담아낸다. 영화를 만들기 전, 주변 지인을 관객으로 상정하고 그 사람을 대변할 수 있는 캐릭터를 구축한다. “특정인이 내주는 자기 목소리를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물을 만들어요.”

  그렇게 만든 인물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배우들과 끊임없는 소통은 필수다. 우선, 출연 배우들에게 국내 퀴어영화를 보라고 권유한다. 해당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캐릭터에 대한 배우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공을 들인다. 배우에게 인물을 이해시키는 과정은 심리학 전공자로서 빛을 보는 순간이다. “심리학을 전공하면 어떤 인물에 대해 개념화하는 데 익숙해지거든요. 인물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배우들에게 전달하면 큰 도움이 돼요.”

백인규 감독(오른쪽)이 배우와 대화하고 있다.

 

  퀴어영화 바라보는 시선 달라져

  백인규 감독은 김조광수 감독과 이송희일 감독을 잇는 2세대 퀴어영화 감독으로, 청소년기에 1세대 선배들의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다. 그는 1세대 감독들이 주로 활동했던 2000년부터 2010년까지는 오늘날처럼 젠더 갈등이 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후회하지 않아>는 아마 대중들에게는 국내 최초 퀴어영화로 인식이 됐을 텐데, 호의 혹은 호기심 어린 시선이 대부분이었어요.”

  그의 첫 작품 <퀴어영화 20>을 개봉한 2013년까지만 하더라도 선배 감독들의 활동 분위기가 이어져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 악플이 달리긴 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가 군대를 제대한 직후인 2018년 개봉한 <퀴어영화 뷰티풀>에 대한 반응은 이전과 대조적이었다. 내용도 그의 작품 중 가장 밝고 대중적이었다는 점에서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악플을 보면 저한테 악의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위가 높아서 놀랐어요. 사회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죠.”

  백인규 감독은 현재 우리 사회가 과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젠더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대감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퀴어들 사이에서도 입장과 의견이 파편화됐다. “과거에는 퀴어라는 이름 하나로 뭉쳐있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성별이나 성적 지향에 따라서 나뉘고, 그 안에서도 사안에 대한 의견이 정말 다양한 것 같아요.”

 

  영화인을 꿈꾸는 고대생에게 백인규 감독은 어떻게든 될 테니 일단은 저질러보라고 말했다. 본인 역시 일단 영화 제작을 저지르고,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제대로 배운 것이 없다고 미루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영화제작 기회는 현실적으로 사라져요. 하지만 학부 때는 자기가 마음먹으면 방학 때 영화 한 편 뚝딱 만들 수 있으니 부딪혀 봤으면 좋겠어요.”

글 | 송다영 기자 foreveryoung@

사진 | 박상곤 기자 octagon@

사진제공 | 백인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