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개인을 미워하는 것은 자유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한다고 해서 그릇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이 개인을 판결하는 것은? 개인이 사적으로 누군가를 판결하고, 집행하고, 벌하는 것은 자유인가? 그것은 자유가 될 수 없다. 아니,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비질란테라는 제목을 가진 네이버 웹툰이 있다. 해당 작품은 법에 따라서 재판을 받았지만,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을 선고받은 범죄자들을 비질란테라는 별명을 지닌 주인공이 사적 제재를 통해 징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웹툰을 보면 통쾌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은 범죄자를 비질란테가 대신해서 벌하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구조다. 그렇다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안타깝게도 비질란테 역시 현실에서는 악이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서사적 구조에 중독된 것 같다. 법이라는 가치 위에 자신들만의 정의를 형성하고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지금 당신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객관적인 정의에 부합하는가? 소설 같은 서사 장르에나 어울리는 이상적인 정의가 아닌, 현실적인 정의가 정녕 맞는가?

  정의는 법의 테두리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법이 정의라는 가치를 모두 담아낼 그릇이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회계약론을 바탕으로 국가를 형성하고 국가는 정의를 법에 기탁하였다. 법의 집행은 판사의 판결봉 끝에서 이루어지는데, 어찌 사적인 개인이 그 신성한 망치질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일까. 자경단(vigilante)이 존재하는 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만 유효하다. 우리를 지키는 방패도, 우리를 벌하는 검도 지금은 국가의 소유다. 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자경단이 되려고 하는가. 자경단을 위한 나라는 없다.

  디지털 교도소는 그들만의 용의자를 처형대 위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만의 용의자를 벌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대중들은 단지 저들이 처형대 위에 끌려왔다는 것만을 보고서 그들을 벌 받아 마땅한 죄를 지은 범죄자로 규정한다. 그리고 돌을 던진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대중들이 던진 돌이다. 돌을 던지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죄가 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처형대 위에 놓인 저들은 정말, 죽을죄를 지은 사람들인가? 아니, 죄를 지은 사람이긴 한 걸까?

정윤식(문과대 국문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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