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의과대학 시절 증명사진
서울여자의과대학 시절 증명사진

 

  가르치는 자, 스승에 대한 기억은 누구나 있다. 멋모르고 어리숙한 시절 때로는 따끔하게, 때로는 너그럽게 감싸준 스승. 조지훈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따뜻하면서도 엄격할 땐 매서운 참스승으로 그를 회상했다. 젊게 살다간 지훈보다 훌쩍 나이 들어버렸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지훈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들에게 하나둘 지훈에 대한 추억을 꺼내왔다.

 

챙김 받아 배불렀던 시절

-최찬희(법학과 51학번) 고대신문 동인

  6·25사변 통에 본교에 입학한 최찬희 교우는 대구 가교사(假校舍) 시절을 기억한다. 여고생 시절 담임이던 지훈을 거기서 다시 만났다. 고대신문도 지훈의 권유로 들어왔다. 와서도 혹여 남학생들과 잘못 어울릴까 노심초사. 항상 세심한 눈으로 감싸셨고, 고생한다며 늘 배불리 먹였다. “우리가 그때 돈이 어딨겠어. 피난 시절 우리를 거둬 맥이고 영양보충 해주러 다니셨어요. 본가에도 데려가 닭을 몇 번을 잡아 먹였죠.” 모두가 배고픈 시절, 학생기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밥 먹이는 게 지훈의 일과였다.

  최 교우의 기억 속에 지훈은 음악을 좋아했다. 기자들 일이 끝나면 함께 다방에 가 음악을 듣곤 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작품 번호까지 알려주며 두세 시간씩 음악을 감상하곤 했다. “그럴 땐 또 삼촌 같지. 돌아보니 지훈 선생님께 고마워요. 법학을 전공한 내가 문학을 접하고, 음악까지 접할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지. 내가 복이 있었나 봐요.” 오랜만에 떠올린 지훈 선생 생각, 소녀 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에게 을 알려준 사람

-김인환(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국문과 지도교수 지훈의 인상은 교재 하나 없이 칠판과 분필만으로 종횡무진 강의를 이어나가던 열정이었다. 당시 국문과 학부생이었던 김인환 명예교수는 지훈 선생님의 몸이 편찮아 결강도 있었지만, ‘교양 국어수업만은 결강 없이 가르쳤다고 했다. “우리말다운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것을 힘써 가르치셨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프랑스는 16세기부터 프랑스 말을 써왔으나 우리는 20세기 후반기에야 우리말로 문학을 하고 학문을 하게 됐으니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몇 곱절의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말의 결을 살려낼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학생들이 시를 써서 댁으로 가져가면 모두 손수 첨삭도 해주셨죠.”

  또한 지훈은 제자들에게 격식을 차리지도 않았다. “함께 술을 마시며 서로 속마음을 터놓기도 하고, 학생들과 손을 맞잡고 한숨을 쉬기도 했어요.” 불의에 맞서 학생들이 일어나면 누구보다도 앞에 나아가 격려하는 선생.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19655, 조선일보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진해 발언을 학생과 언론과 학자를 버리고 정치를 하려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한 지훈이 정치 교수로 몰렸을 당시, 학교에 누가되면 언제든 그만두겠다는 의지로 사직서를 항상 가슴에 넣고 다니셨던 게 기억이 나요.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 교양, 인품이 조화를 이룬 지훈 같은 대인을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을 겁니다.”

 

바르게 살라 하셨다 -홍일식 전 총장

  “지훈 선생은 시인, 논객, 학자 이런 게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고매한 선비 상이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말로 홍일식 전 총장은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지훈의 성품이 다모다양했다고 표현한다. “지훈 선생은 아량이 넓으신 분이었어요. . 내가 취중에 실수를 범하고 부끄러워 면목 없었던 적이 있었어요. 대학원생 때 일인데 합승택시에서 요즘 대학생 놈들 4·19 때인 줄 안다는 순경의 말을 듣고 들이받은 적이 있어요. 4·19 혁명 때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며 감격했던 나인지라 그 말에 화를 참지 못했지요.

  집에서 쫓겨나와 간 곳이 지훈 선생님 댁이었는데 그때 지훈 선생이 어서 오라며 나를 반겨줬어요. 면목 없다는 내 말끝에 금방 술 한 병을 내놓으시며 밥 먹고 체했다고 밥안 먹나? 술 먹고 실수했다고 술 안 먹어?’하시면서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하셨죠. 열무김치를 안주로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선생님과 술을 기울였던 기억이 나요. 선생님도 더 큰 실수를 한 적 있다는 일화도 들려주시면서 위로해 주셨어요. 선생님 자신의 실수도 들려주시면서 부끄러워하는 제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그런 아량을 지니신 큰 스승이셨어요.”

  섬세하고 너그러운 면만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지훈의 당당함과 매서운 지조가 드러나는 일화도 들려줬다. 지훈의 왼손 등에는 거무튀튀한 흉터가 있었는데 지훈 선생께 그것이 무엇이냐고 여쭈어봤단다. 지훈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다.

  "6.25의 포성이 멈추지 않았을 때 명동성당에서 당시 노기남 대주교님의 초청으로 문인들과 신부님들이 어울린 술자리가 열렸대요.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죠.” 당시, 고문당할 적 화젓가락으로 배를 쑤심 당했지만 강한 지성과 의지로 버텼다는 사육신들의 얘기에 담뱃불이 조금만 스쳐도 못 견디는 게 인간인데 의지로 지조를 지킨다는 것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겠는지라며 인간의 의지와 지조를 얕보는 신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지훈은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게 바로 지성이다. 담뱃불만 스쳐도 못 견디는 게 사람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내가 보여주겠다며 성냥개비 대여섯 개를 꺼내 불을 붙여서 자기 손등에 올려놓고 살이 지글지글 타들어 가는 것을 태연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때 곁에 있던 박목월 시인에게도 이 일화를 들었어요. 지훈 선생의 행동에 주변인들은 물론 그 신부의 얼굴도 하얘졌는데, 정작 지훈 선생은 아무렇지 않게 불이 제풀에 꺼지자 손등의 재를 툭 털어내고는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였대요.”

  이처럼 의지와 지조가 대쪽 같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지훈 선생은 인품과 처세가 비범하셨다. 남을 대할 땐 상대를 먼저 배려하시지만, 옳지 않을 땐 과감하게 매도하셨다. 인간으로서 지성인으로서 롤모델이라며 지훈을 회상했다.

 

1968년 5월 18일 마석 산소 운구 당시 학생이었던 최동호 명예교수가 지훈의 영정사진을 들고있다.
1968년 5월 18일 마석 산소 운구 당시 학생이었던 최동호 명예교수가 지훈의 영정사진을 들고있다.

 

그때 스승이 무엇인지 알았다

-최동호(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1967년도 2학기 본관 302. ‘시론의 첫 강의 시간, 지팡이를 짚고 수업에 온 지훈이었다. 학부생이었던 최동호 명예교수를 비롯한 모든 수강생이 지훈에 대한 커다란 호기심이 무르익을 무렵, 장대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는 교실을 울렸다. 지훈의 목소리는 최 교수의 마음에 큰 울림으로 남았다. “시론을 가르치시며 언어적 기교보다 그 시에 담긴 정신이나 철학이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가끔 창밖 멀리 바라보는 안경 너머의 시선은 앞으로 제가 걸어야 할 보이지 않는 문학의 길을 암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 떠올려보니 훌륭한 선생은 지식만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었다. “무언의 가르침. 거기서 자신의 갈 길을 찾는 거라 봅니다. 머릿속 지식은 한계가 많아요. 지식으로 말을 하면 거기서 깊은 교감은 사라져요. 요즘은 지식이 범람하고 헛된 말이 너무 많죠. 후에 생각해보니 지훈 선생님이 선사의 설법 같은 화두를 던지고 갔던 것 같아요.”

  지훈의 장례식 당시 마석 언덕에 관을 안장한 일도 최 교수에겐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다. “당시 66학번 친구들이 운구를 했는데 산언덕이 가팔라 모두 힘들어했어요. 우연히 영정사진을 들고 앞에서 올라갔는데 그것이 운명적인 일이 아니었나 돌이켜 보게 되네요. 그때 사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장으로 재직하던 200610, 교정에 조지훈 시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과정은 지난했지만, 조지훈 시비를 건립해 고대의 정신적 원점을 세운다는 생각에 정성을 다했다.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시비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졸업식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보는데 커다란 보람을 느낍니다.”

 

이성혜 기자 seaurchin@

사진박상곤 기자 octagon@

사진제공최동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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