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훈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하태훈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모질고 거친 언어를 써야 비판에 힘이 실리는 것인지, 요즈음유 명 논객이나 정치사회비평가의 언어가 그렇다.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언어도 품격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조잡한 표현과 비아냥, 빈정거림으로 가득 차 있다. 저격수라 불리는 자들의 언어 구사는 더 자극적이고 살벌하다. 언론의 주목을 받아 연일 인용되어 기사화된 것만 보면 그렇다. 비방이자 모욕이고 차별적 언어 일색이다. 정당한 비판이고 표현의 자유라지만 도가 지나치다. 독자를 개떼라 칭하는 블로거, 특정 국회의원을 누구의 똘마니로 칭하는 논객도 있다. ‘똘짓’, ‘양아치’, ‘개소리같은 비속어를 민의의 전당에서 함부로 내뱉는 국회의원도 한둘이 아니다. ‘견찰’, ‘무뇌아’,‘애꾸눈등은 상대방을 비하하고 폄훼하는데 다반사로 등장한다. 저잣거리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단어들이 지식인이나 정치인, 공당 대변인의 입에서 거리낌 없이 터져 나온다. 분노의 감정을 분출하게 해 싸움을 부추기는 갈등의 언어들이다.

  언론의 이목을 끌고 팔로우어를 늘려 보려는 심산이다. 조회 수 때문이다. 언론이 자극적이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사 제목을 뽑듯이 관심 끄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짧고 도드라지게 써야 읽힐 수 있다는 강박 때문에 거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품격있는 언어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점잖은 언어는 무플이다. 무플보다는 악플이라고 그런 수사법은 다 의도가 있는 것이다. 클릭 수가 중요한 언론도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언어를 선호한다. 이슈의 본질보다는 그런 단어에 방점이 찍힌다. 그러는 동안 소셜미디어라는 공론장은 키보드워리어가 선택한 부적절한 언어와 표현으로 오염된다. 내용과 메시지는 온데간데없고 그들이 두드린 자극적 문구, 말초적 언어만 떠올라 또 다른 논란이 증폭된다. 실체는 없고 언어유희만 춤을 춘다. 발언과 비판의 수위가 강하면 강할수록 반응은 커진다. 기자의 검색레이더에는 도발적이고 선동적인 언사만 눈에 들어와서 그런지 곧장 기사화된다. 언론에 노출되면 내 편 네 편이 확실히 갈라진다. 싸움의 전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유적 언어 구사를 잘하는 논객이 승자가 된다. 적어도 언론에 등장하는 횟수만 보면 그렇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자기편을 끌어모으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갈등의 언어, 이분법적 갈라치기, 신조어가 그들이 애용하는 언어 사용법이다.

  한번 글자화된 언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말은 휘발성이 있지만, 자판기를 두드려 생산 유통된 언어는 흔적이 남는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쌓여 상처를 남긴다. 말이 칼이 되어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그래서 상대방의 가슴을 울리는 비판이 아니라 찔러 죽이려 드는 비판의 언어는 금물이다. 소셜미디어는 일기장이 아니다. 단톡방은 물론 11 대화방도 사적 비밀의 공간이 아니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다. 분노하고 과열된 상태에서 격한 감정을 표출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자판을 두드리기 전에 한번 머릿속으로 굴려봐야 한다. 꼭 비판해야 하나, 그러다가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지 등 자기검열 하라 얘기가 아니다. 비판은 하되 품격 있는 언어로 비판해야 한다는 말이다. 언어 감수성을 높이라는 뜻이다. 차별적인 언어인가, 성희롱적이고 모욕적인 단어가 아닌가를 점검하라는 의미다. 잘못을 보았다면 지적하고, 부정의와 맞닥트렸다면 의당 분노하고 비판해야하지만 욕설을 해대고 모욕적 언사를 쏟아내라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지식인, 언론, 논객, 야당의 할 일이다. 그러나 품격있는 언어로 언어감수성을 높여서 해야 한다. 말과 언어는 화자의 생각이다. 말이 쌓이고 쌓여 사람의 품격을 만든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사람이 들었어도 순식간에 전파될 수 있다. 자판기에서 나온 언어는 수천 명의 눈과 가슴으로 전달된다. 그러니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퍼지고 저장되어 훗날 언제 어디서 소환될지 모른다. 나의 말과 언어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옭아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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