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교수·논객·학자였던 지훈

고대신문 통해 사회 화두 던져

지조있는 삶으로 일관한 참스승

 

  조지훈을 <승무>를 떠올리고,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으로만 기억한다면, 그에 대해 절반도 아는 게 아니다. 그는 4·19 혁명의 불꽃을 지피고 혁명의 정신이 이어가길 바랐던 지조 있는 시인이자, 한국의 민족문화사를 재정립한 국학자다. 지성인의 소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열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 풀 향(芝薰)이 캠퍼스 곳곳에 자욱하다.

두루마기를 입은 조지훈 교수의 모습(왼). 과거 고려대 대운동장에서 제자와 함께 찍은 사진

  음력 1920123일에 태어난 지훈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다. 1939고풍의상이라는 시로 등단한 그는 서울여자전문대에 교수로 몸담다 194710, 본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27세라는 젊은 나이, 고려대와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상윤 초대 총장이 박학다식한 그의 면모를 보고 구자균(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에게 교수로 초빙해 달라 요청했다.

  ‘북악산 기슭의 우뚝 솟은 집을 보라교가의 유려한 가사는 지훈의 작품이다. 교가를 작사해 보성전문학교 시절의 구 교가를 대체했다. 각 절마다 박혀있는 자유, 정의, 진리는 1955년 이후 지금까지 불리고 있는 고대의 정신이다. 고대인이 사랑하는 대표 응원가, ‘민족의 아리아의 원가사 또한 지훈이 지었다. 본관으로 가는 길목, 학생들의 항상 여기에 자유의 불을 밝히고’, ‘정의의 길을 달리고 진리의 샘을 지키나니’, ‘지축을 박차고 포효하길 바란 스승의 마음이 호상비문에 담겨있다.

 

본교 교정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마해송, 조지훈, 이한직

 

  지훈은 고대신문 지도위원 교수로서 사회에 화두를 던지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신근재(법학과 51학번) 교우는 가끔 신문사에 나오시면 한 말씀 하시는데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기개가 있었다그분은 우리들의 아이돌이었다고 회상한다. 지훈에게 고대신문은 단순히 대학의 학보가 아닌, 한 사람의 문예가가 작품을 발표하는 지면으로 쓰였다. 서명일 본교 박물관(관장=강제훈 교수) 기록자료실 과장은 신문이 사회적 공개를 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도 발표하고, 사회에 던지려는 메시지도 전달했다고 전했다. 1952311일자 고대신문에는 지훈이 직접 번역한 두보의 한시 <애강두(哀江頭)>가 실려있다.

 

1952년 3월 11일자 고대신문에 지훈이 두보의 <애강두>를 번역한 글이 실렸다.

 

  지식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호랑이 선생처럼 학생들을 끊임없이 바로 세우기도 했다. 1958년 고대신문에 기고한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에서 지훈은 학문에의 침잠을 방패 삼아 이 참혹한 민족적 현실에 눈감으려는 경향은 없는가라는 문장으로 독재에 눈 감으려는 학생들을 꾸짖기도 했다.

  ‘지조에 대해선 양보 없는 고고한 선비 정신의 정수였다. 교수 13년 차에 맞은 3·15 부정선거는 조지훈이 그저 두고 볼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수필 지조론으로 이승만 정권하 정치인들의 지조 없음을 질타했다. 올곧음의 정점은 4·19혁명이다. 당시 지훈은 감격해 425일의 교수 시국선언을 집필해 학생혁명을 지지하고, 거리시위에도 나섰다.

  196053일자 고대신문에 발표된 지훈의 헌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4·18 본교생 시위와 이어 터진 전국적인 4·19 혁명이 경탄스럽고, 스승으로서 제자들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이 담겨있다. 인촌기념관 들어서는 길, ‘조지훈 시비의 뒤편에 멈춰 서면 빼곡한 헌시가 새겨있다.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지훈의 진심이다.

 

인촌기념관으로 가는 길목,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가 새겨진 시비

 

  어떻게 쓰면 마음이 더 잘 전달될까, 썼다 지운 흔적이 빼곡한 지저분한 원고, 어린이 신문 소년한국일보창간호에 지훈의 시가 한 편 실렸다. <너희들은 보았을 것이다>, 혁명을 마주한 어린 관찰자들에게 던지는 기억의 시구다. 서명일 과장은 실제 4·19혁명 때 초등학생들도 부상과 죽임을 당했다어린 너희들이 혁명을 보았다면,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고, 느낀 바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소년한국일보 창간호에 실린 시 <너희들은 보았을 것이다>의 육필원고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의 인생은 선비의 길이었다. 해방 이후 좌우 이념으로 변질된 문단 정치와 권력에 얽매이지 않은 그. 한 발 뒤로 물러나 사태를 조망, 성찰하며 4.195.16과 같은 역사의 격동기마다 토해낸 울부짖음. 그의 푸른 지조가 시의 순수를 믿는 청록파 시인, 부정(不正)에 침묵하지 않는 논객으로 만들었다.

  9일부터 일주일 동안은 지훈 주간이다. 전시회부터 시 낭송회까지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낙엽 진 길을 걸으며 지훈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조용한 산책은 어떨까.

 

고려대 본관 앞에서 찍은 교수진 사진. 1열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지훈

 

남민서 기자 faith@

사진양태은·박상곤·박소정 기자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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