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僧舞) / 조지훈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을 두고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크고도 섬세한 손이라고 했다. 격동기 민족을 정초하려는 큰 뜻에 섬세한 서정을 두루 지닌 그의 면모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지훈은 전통적 서정성을 현대시에 계승, 발전시킨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1939년 문예지 문장에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가 추천되면서 등단한 조지훈은 우리 시단의 신고전이라는 정지용의 추천사와 함께 문단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자연, 전통, , 불교 등을 소재로 순수서정을 다듬은 조지훈은 분단 후 남한 시단의 주류를 형성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419 혁명 속에서 학생을 독려하는 등 실천적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말년에는 본교 민족문화연구소(현 민족문화연구원) 초대 소장을 맡으며 민속학과 역사학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민족문화학으로 명명한 학문 영역을 개척했다.

  다방면에 걸친 조지훈의 문학적, 학문적, 사회적 업적은 학자들에겐 오랜 연구 대상이다. 1016일 본교 국어국문학과의 주관으로 열린 조지훈 탄생 100주년 기념 포럼에서 본교 내외 8명의 연구자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지훈의 학문과 시 세계를 재조명했다.

 

  이념대립 속에서 강화된

  자연과 전통의 서정

  조지훈은 <문장>으로 등단한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1946년 공동시집 <청록집>을 간행하며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나갔다. 3명의 청록파 시인은 자연을 소재로 순수서정을 노래하면서도 각자 개성을 드러냈다.

  ‘자연은 해방 후 이념 대립이 격화되는 시대상 속에서 부각됐다. 당시 청록파는 문학이 이념 대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김종훈(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순수와 자연은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청록파는 참여와 경향이라는 좌파 이데올로기의 대안으로 자연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특히 조지훈은 사라져가는 민족 정서에 대한 애착을 보이며 전통적 서정과 불교적 사상을 시로 표현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시풍의 배경에 <문장>과 추천자 정지용의 영향이 있었다는 해석을 내놨다.

  <문장>1939년 소설가 이태준이 창간한 문예지로 정지용이 시 선정위원을 맡았다. 오형엽(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태준은 전통적인 가치를, 정지용은 순수문학의 현대화를 추구했다등단 당시 정지용은 조지훈에게 고전적인 작품을 쓰라고 조언했다고 설명했다. 스승의 조언으로 신고전을 추구하며 자신을 가다듬은 조지훈은 그 결실로 낙화’, ‘산방과 같은 대표작들을 탄생시켰다.

  12행이 반복되는 형식과 압축적인 시어를 통한 여백의 구사. 정지용은 이러한 지훈의 시를 자연과 인공의 극치라고 평하기도 했다. 시에 나타나는 복고적인 내용의 자연과 형식미의 인공이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다.

 

  시각적 미학 넘어

  청각성·존재성 고찰 이어져

  지훈 시의 아름다움은 시각적 형상화에 의한 묘사로 쉽게 이해된다. 색채, 형태, 풍경, 율동 등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주로 부각하며 시의 미학을 더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오형엽 교수는 표면적인 미학인 시각성에서 나아가 청각성과 존재성이라는 심층적인 미학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례로, 지훈의 대표작 승무에서는 시각적 이미지가 시의 전면에 드러난다. ‘하이얀파르라니의 색채를 대비하고, ‘나비’, ‘박사’, ‘외씨보선의 형태를 묘사한다. 시의 핵심인 승화의 지향점은 별빛이라는 빛의 시각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하지만 은근히 발현되는 청각적 이미지도 있다. ‘황촉불이 말 없이 녹는’, ‘적막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에서 떠오르는 울음소리가 그것이다. 청각적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적막의 소리로 나타난다. 적막은 승화의 공간인 을 더욱 아득하고 신비한 공간으로 만든다.

  “귀또리의 소리가 들릴락 말락 깔리는 밤을 떠올려보세요.” 오 교수는 적막한 밤이 다수의 대표작에서 승화의 공간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밤의 적막함은 세속에서 벗어나 승화를 가능케 하는 승화의 거점이 된다. 청각성의 미학과 결합되는 이라는 시간은 시적 주체가 당면한 존재론적 상황이면서 지향점이다. 대부분의 일제강점기 시에선 밤이 암담한 시대현실로 해석되지만, 지훈의 시는 다르다.

  오 교수는 지훈의 다수 작품에서 밤을 거점으로 현실계를 뛰어넘는 인간존재의 본질과 궁극적 세계를 추구하려는 자세가 드러난다형이상학적 추구와 승화의 지향점인 별, , 촛불은 아침이 되면 모두 사라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동안 조지훈의 연구에 있어 논의가 부족했던 형이상학적 추구라는 주제의식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현실에 뜨거운 감성있고

  ‘보편에 입각해 세상 바라봤다

  해방공간 지훈의 작품에는 서정성에서 한 발 넘어선 사회성이 엿보인다. 해방 후 이념대립,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정변이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에 조지훈은 실천적 지성인으로 역사에 면면이 등장한다.

  김종훈 교수는 자연, 전통, 선 등의 정서만으로 구성해온 지훈의 시 세계에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종훈 교수는 그 정서로만 조지훈을 규정하기엔 조지훈이 너무 다양한 경향을 보인다조지훈의 삶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일관된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꼽은 일관성은 뜨거운 감성이다.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은 다르게 나타나지만, 각 시대와 맞닿아서 발생한 뜨거운 감성을 시에 일관되게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등단 전의 시들은 서양의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염세적이라면, 청록집과 풀잎단장 이후 5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참여적인 시들이 나온다청록집에 비해 거친 이들 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른 시각차가 있다고 말했다.

  지훈의 시 전반을 두고봤을 때 <청록집>의 표현은 예외에 가깝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청록집>의 예외성은 <청록집>에서 승무의 내용이 <조지훈 시선>과 다르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승무의 첫 구절은 <조지훈 시선>에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라는 11행으로 나타나지만, <청록집>에서는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네라12행이다. 김 교수는 “12행 구성은 호흡이 길어 의미 표현에 적절치 않지만 정지용의 형식에 맞춘 것이라며 조지훈 선생이 직접 고른 시집에는 11행으로 표현돼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오형엽 교수는 내밀한 서정이 드러난 시 세계와는 달리 학문 세계에서 조지훈은 보편성을 추구했다고 설명한다. 오 교수는 해방 전후 역사적 혼돈 속에서 좌우 이념은 물론 서양문예사조가 모두 혼재돼 있었다하나의 주류가 없는 상황에서 조지훈은 보편성의 측면에서 모든 걸 종합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지훈의 시 이론서 <시의 원리>에 소개된 지훈의 시론에서도 보편성 추구의 흔적이 있다. ‘시의 원리의 서문에서 조지훈은 시의 원리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를 모든 대립되고 착종된 시론의 공통한 바탕으로서의 시의 통일된 자리를 찾고자 했다고 밝혔다. 오 교수는 조지훈은 동서양의 사상과 문학이론을 아우르는 보편시론을 정립하고자 했다한국학에 열중했다고 해서 서양 학문을 배척했다는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사상적, 학문적 선택에 있어서 보편성을 추구했던 지훈의 태도는 그의 저서 <한국민족운동사>에도 드러난다. <한국민족운동사>에는 1884년부터 1945년까지 60년간의 근대민족운동사가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서술돼 있다. 오 교수는 조지훈은 대표적인 보수의 논객이었지만, 통일을 대비해 민족의 관점에서 좌파까지 아우르는 역사를 기술했다격동하는 근현대사에서 학문적, 사상적 선택을 강요받을 때 선생은 꿋꿋하게 모든 걸 종합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호상비문(虎像碑文)

민족(民族)의 힘으로 민족(民族)의 꿈을 가꾸어 온

민족(民族)의 보람찬 대학(大學)이 있어

너 항상(恒常) 여기에 자유(自由)의 불을 밝히고

정의(正義)의 길을 달리고 진리(眞理)의 샘을 지키나니

지축(地軸)을 박차고 포효(咆哮)하거라

너 불타는 야망(野望) 젊은 의욕(意慾)의 상징(象徵)

우주(宇宙)를 향한 너의 부르짖음이

민족(民族)의 소리되어 메아리치는 곳에

너의 기개(氣槪) 너의 지조(志操) 너의 예지(叡智)

조국(祖國)의 영원(永遠)한 고동(鼓動)이 되리라

 

최낙준 기자 choigo@

사진양태은 기자 aurore@

일러스트장정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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