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깃발을 꽂는다고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 보이는 그림이 더 좋아질 뿐이다. 설령 깜빡하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깃발을 꽂지 않더라도 에베레스트 등정은 등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깃발을 꽂는다. 달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도, 이오지마섬을 점령했을 때도, WBC 한일전에서 승리했을 때도. 신성한 의식마냥 매번 깃발을 잊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깃발 꽂는 행동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면 DNA에 각인된 결과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정복 전쟁을 즐기던 본능이 오랜 기간 유전을 거치면서 폭력적인 요소가 점차 사라지고 깃발을 꽂는 최종적 행위만 남은, 문명화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 몸속 깊숙이 잠재된 정복 욕구가 깃발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다.

○…요즈음 들어 자신의 흔적을 더욱더 먼 곳에까지 남기려는 정복자의 후예들이 보인다. 이들의 특징은 구시대적인 깃발 대신 학교가 발급해주는 발열 스티커를 공공시설에 붙이고 다닌다는 점이다. 고려대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과시하려는 정복 욕구의 발현일지도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정복 욕구가 무제한적으로 분출된 결과가 추악한 제국주의라는 걸 돌이켜보면, 함부로 스티커 붙이고 다니지 말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조민호 취재부장 do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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